밤아는 고학년이 되었고, 극심했던 코로나도 잦아들어 어느새 정상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상인데, 그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큰 감사함이 될 줄은 몰랐다. 강제로 등교를 중단하고 가정에서 화상으로 학교 수업을 이어가면서 밤아는 학습적인 면에서 많은 부분을 따라잡았다. 다시 말해, 말을 시작한지 1년 반 만에 학교에 입학해서 교우 관계도 힘들고, 공부를 따라가는 것도 힘겨웠지만, 코로나로 생긴 여유 시간에 집에서 다방면으로 공부를 한 덕에 친구들을 앞서가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선생님의 수업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준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의 ‘예중 합격 프로젝트’도 은밀하게(?)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예중 입시까지 1년하고도 절반 이상이 남았다. 하지만 밤아도 이제 초등학교 5학년. 언젠가 사춘기의 입질이 와서 공부 안 하겠다고 엄마랑 다투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그래서 좀 더 진도를 빨리 나가고 정말로 사춘기 시기가 왔을 때 엄마의 간섭이 아닌 ‘스스로 하는 공부’가 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계획은 5학년 겨울방학까지 예중 입시에 필요한 전과목을 완성해보자. 6학년 1학기 국어, 수학, 사회, 과학 교과서를 개념 정리까지 끝내야 한다. 차근차근 하다 보면 결국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밤아가 인공 와우 수술을 받기 전에는 항시 부정적이고 우울한 마인드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수술 이후 발전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를 긍정적인 마인드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긴 이미 바닥을 찍었으니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찌 보면 참 다행한 일이었다.
밤아가 고학년이 되고 나서는 휴대폰으로 사진 찍는 활동이나 독후활동 같은 학습이 더 이상 아이의 수준에 맞지 않다고 느껴져서 밤아의 재능을 활용한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역시나 밤아가 어려워하는 과학의 식물 파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을 골라 컬러풀한 색연필들을 주고 직접 그리도록 했다. 아주 공을 들여 꼼꼼하게 그리고 있는 밤아의 모습. 역시 밤아는 그림 그릴 때 가장 집중을 잘 하는 것 같다. 덕분에 그림 한 번 그리고 설명글을 덧붙여 쓰면 어려운 내용을 비교적 쉽게 이해하게 되는 것 같고 암기도 쉽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림을 완성한 후 관련 문제를 풀게 하니 얼추 잘 맞힌다. 그냥 무작정 주입식으로 공부하고 암기하는 공부에 비해 시간은 다소 소요되지만 효과 만점인 학습법인 것은 분명했다.
산성과 염기성을 공부할 때 나오는 실험 부분은 집에서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보여졌다. 나는 마트에 가서 보라색 양배추를 구입해왔다. 밤아에게는 다이소에 가서 스포이드가 달린 공병을 사오라고 시켰다(스포이드라는 단어를 몰라서 공책에 그려줬다). 그리고 밤아에게 칼로 양배추를 자르게 한 후, 물을 끓여 양배추를 데치게 하니 물이 보라색이 되었다. 이렇게 ‘양배추 지시약’을 만들어서 스포이드 공병에 넣은 후 밤아와 동생에게 하나씩 주고, 집 안에 있는 물질에 양배추 지시약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보도록 했다. 레몬, 사이다, 비눗물, 유리 세정제 등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은 내가 제공해주고, 그 외에는 자유롭게 실험해볼 수 있도록 했더니 온 집안을 다니며 즐겁게 실험했다. 아이들은 양배추 지시약이 어떤 물질과 닿았을 때는 붉은색으로 변했고, 어떤 물질과 닿았을 때는 푸른색, 노란색으로 변했는지 서로 설명하기 바빴다.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말 쉽고 간단한 실험이다. 하지만, 엄마가 아이들을 학원에 맡겨 놓고 학업에 신경 쓰지 않으면 교과서에 양배추 지시약이 나왔는지, 페놀프탈레인이 나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가정학습으로 함께 공부하니 나도 이런 과학 상식을 한 번 더 공부할 수 있게 되어 뿌듯했고, 아이는 정말 살아 있는 학습의 장을 몸소 체험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 얼마나 갚진 일인가!
사회는 저학년 때 보던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에서 「읽으면서 바로 써 먹는 어린이 한국사 퀴즈」로 책을 바꾸어 보았다. 물론 전자는 시리즈 책이고, 후자는 아주 간단한 퀴즈 책이다. 이 간단한 퀴즈 책이 여행 갈 때에도, 식탁 위에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책으로 퀴즈를 내고 맞히는 활동을 하기 위해 공부를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저학년 때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에 대한 공부를 교과서 중심으로 시작했었고,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만화책으로 얕게나마 역사를 접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흥미가 아예 없지는 않은 상태였다. 적어도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해 설명할 줄 알고, 정약용 선생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자랑하듯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무엇을 했는지, 윤봉길 의사는 또 무엇을 했는지, 부끄럽지만 엄마인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어서 역사를 공부하기에 앞서 부담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잘 아는 것 같아서 오히려 내가 부담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5학년 2학기부터 6학년 1학기까지의 사회 교과서를 보면 고조선부터 광복 이후의 역사가 쉴 틈 없이 펼쳐진다. 사회를 가르쳐야 하는 나조차도 교과서를 처음 본 순간 동공에 지진이 왔다. 그래서 예전에 미리 점 찍어둔 EBS 「매일 쉬운 스토리 한국사」책을 구입해서 강의를 시청하기로 했다. 하루에 20분 정도도 안 되는 짧은 강의를 1개씩 함께 봤는데, 생각보다 그림 자료도 많고 내용이 재미있어서 밤아가 “엄마, 하나만 더 보면 안돼요?”라고 하는 바람에 하루에 3개를 본 적도 있다. 이렇게 60강이나 되는 강의를 밤아랑 함께 보니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의 흐름이 어느 정도 잡힌 것 같았다. 하지만 흐름만 잡아서는 안 된다. 밤아의 ‘예중 합격 프로젝트’에서 성공하려면 흐름 잡고 암기까지 해야 완벽해진다. 그래서 EBS 시청 후 EBS 만점왕 교재로 디테일하게 정리하고, 교과서를 몇 회 정독한 후 문제까지 풀었다. 흐름은 잘 알지만, 제대로 암기가 되지 않으니 문제에서 오답이 생각보다 많았다. 오답을 줄이는 건 엄마의 몫인 것 같아서 아이가 흥미를 잃기 전에 암기를 위한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만 했다.
밤아가 공부한 방법들을 간단하게나마 언급했지만, 표현 언어와 수용 언어의 수준을 높이고 어휘와 조음을 해결해야 하는 재활의 목적과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 위한 학습의 목적, 그리고 ‘예중 합격 프로젝트’까지 세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항상 짓눌렀다. 언어 치료는 횟수는 줄였지만 매주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고, 학교 공부를 따라가는 공부 또한 아직은 초등학생이니 이 정도로만 진행해도 훌륭하다. 하지만 ‘예중 합격 프로젝트’가 발목을 잡았다.
‘전문가 선생님께 배우면 어쩌면 더 잘 할 수도 있는 아이를 내 욕심과 고집으로 억지로 끼고 가르치다가 망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제대로 못 가르쳐서 중학교 입시에 떨어지면, 인생 첫 실패를 경험한 밤아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까?’
이런 생각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뇌리를 스쳤다. 압박을 이겨내고 매일 아이를 마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밤아야, 공부할 시간이야. 이리 와.”하고 부르면 조금 꾸물대기는 하지만, 이내 나타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밤아를 발견하는 순간 ‘아,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하며 새로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밤아는 모든 학습적인 면에서 엄마를 믿고 따라왔고, 나 또한 따라와 주는 밤아를 보며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