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님의 스스로 학습법
암기 시험과 사고력 시험 - 기억의 네트워크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수학 공부를 하는데, 아이와 나, 우리 둘 다 헷갈리고 어려운 부분이 나왔다. 우리가 선택해서 듣고 있는 한 명의 선생님 강의로는 이해하기에 부족한 것 같아서 유튜브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하고 열심히 검색하던 중, 요즘 유명한 강사 정승제 선생님의 강의를 찾았다. 수많은 강의 중 삼각형의 닮음비 부분을 찾아서 보는데, 선생님께서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다.
“공식을 왜 외워요~? 수학 좀 외우지 말아요. 고1 올라가면 암기의 유혹에 빠질 거예요. 내신 시험은 학교에서 프린트 나눠주면 외우고 싶을 거예요. 왜? 시간이 없으니깐. 그리고 생각하기 싫으니깐. 사람은 생각하기 싫으면 암기해. 뇌를 쓴다는 거 자체가 고통이거든. 운전면허 시험 볼 때 암기만 시켜요. 백미러로 어깨가 보이면 운전대를 끝까지 감고......이유는 안 가르쳐줘요. 절대 암기하면 안돼요.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99%가 대부분 암기해요. 그래서 고3 되면 수학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요. 내가 암기하지 말라고 하면 정말 혹독할 거예요. 반장도, 부반장도 다 암기하는데 나한테만 하지 말라고 하니깐......그리고 오히려 시험 점수가 안 나올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걔들은 암기했으니까 다 쓰고 나오겠지. 근데 여러분은 생각해서 풀어야 하니깐......교육과정 담당하는 분이 이 영상을 본다면, 정말 학교 내신 시험이랑 수능 시험이랑 출제 경향만 맞춰줘도 우리나라에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이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내신은 암기하면 유리하고, 수능시험은 사고하라고 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얘기야? 계속 암기하다가 고3 때 처음으로 사고를 하려고 하니깐 이때부터 막히기 시작하는 거라구요. 이거 바꿔야 해요. 아니면, 저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해주시던가, 하하. 정말 바꿔야 해요.”
암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제도적인 문제와 함께 농담으로 마치긴 했다. 하지만 정말 그 말씀에 뼈가 있는 듯했다. 너무 맞는 말씀이라 잊을 수가 없었고, 굳이 이 글을 쓰기 위해 영상을 다시 찾는 수고로움을 거쳤지만, 다시 한 번 들어도 뼈를 때리는 말씀인 듯하다.
학창 시절에 나도 그랬다. 늘 수학 시험 바로 전 날에는 밤을 꼬박 새워 교과서의 연습문제들과 대단원 문제들을 해설지의 풀이 과정을 보며 달달 외웠다. 교과서의 문제가 시험에 똑같이 나올 가능성은 당연히 없겠고, 비슷하게 또는 숫자 정도 바꿔서 나올 테니 교과서와 해설지를 달달 외우자는 마음으로...... 개념도 제대로 모르면서 풀이 과정으로 ‘깜지’를 만들어가며 열심히도 외웠다. 결과는 당연히 고득점, 고등학교 수학 점수가 대부분 90~100점 사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수학을 잘 했을까? 전혀 아니다. 심지어 수학 시험 바로 전 날 외운 내용으로 시험을 보고 나면 머릿속이 리셋 된다. 아무런 기억이 없다. 일단 밤을 새웠기 때문에 머리가 멍한 상태로 겨우 외운 것을 쏟아내서 문제를 푼 이후에는 초단기기억으로 머릿속에 잠시 만들어 둔 나만의 수학 시험공부 내용이 사라져버리는 마법을 겪게 된다. 수학 100점이라고 좋아는 하지만 해당 단원의 기본적인 개념도, 공식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증발되어 버린다. 부모님도 놀라셨다. “아니, 우리 딸이 이렇게 수학을 잘 했어?”라고 하시지만, 모의고사를 보면 수리영역은 반타작도 못하는 점수가 경이로울 정도이다.
마치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살아 움직인 듯한 ‘두뇌 리셋’은 왜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빠르게 외웠기 때문에 제 역할을 다 한 후 빠르게 사라진 것이다. 그야말로 ‘초단기기억’이다. 시험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 낸 ‘초단기기억’은 한 순간의 좋은 점수를 획득한 것 외에는 큰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오히려 초단기로 공부한 내용은 나중에 수능 시험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고3이지만 고1의 마인드로 새롭게 공부해야 하는 불상사만 남겨줄 뿐이다.
사람의 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억을 저장할 수 있다. 감각으로 기억을 저장하기도 하고, 기억되어지는 시간에 따라서는 단기적인 기억과 장기적 기억도 있다. 단기 기억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지만 반복하지 않으면 소멸된다. 반대로 장기기억은 기억의 용량이나 기억의 연속성 등 다방면으로 단기기억에 비해 영구적이다. 내가 고등학교 수학시험 전 날, 밤을 새워가며 암기했던 개인적 추억 같은 어릴 적 기억이나 구구단 같은 것들이 장기기억에 해당한다.
학습은 기억한 것들과 사고한 것들이 서로 콜라보를 이루어야 하는데, 기억한 것들이 단기적이라 소멸되어 버리면 사고해야 할 재료들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무 외우고 싶겠지만 외우지 말라는 정승제 강사님의 말씀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수학이기 때문에 ‘공식을 안 외우고 어떻게 문제를 풀어요?’라는 의문도 당연히 가져볼 수 있다. 단순히 암기만을 위한 암기가 아니라, ‘암기가 될 정도로’ 학습할 내용을 정독하고 이해하는 등 두뇌의 정보처리 회로를 수차례 거치다 보면 우리 머릿속에 들어온 새로운 지식들이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갖추게 된다. 이런 네트워크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사고의 재료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문제를 풀더라도 사고의 재료가 1가지인 상태와 사고의 재료가 10가지인 상태는 문제를 풀어낸 결과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마치 토핑 없는 치즈 피자와 십여 가지 토핑이 어우러진 슈퍼 콤비네이션 피자의 차이 같은 느낌이랄까.
수학은 수많은 가설과 명제들이 쌓여서 증명으로 이루어낸 방대한 학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 배우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즉 직각 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것을 기호로 외우면 너무나도 간단하다. ‘a²+b²=c²’ 솔직히 암기까지 5초도 채 걸리지 않는 간단한 공식이다. 이 공식을 외우면 중간/기말고사에서 1문제, 많게는 2문제 정도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나오게 된 원리를 공부하면 이와 연관된 다양한 문제들을 간단한 사고만으로도 풀어낼 수 있다. 그래서 정승제 강사님이 제발 암기 좀 하지 말라며 뼈를 때리는 듯한 말씀을 쏟아내신 것 같다.
역사나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정묘호란에 대해 암기를 해버리면 당장의 중간고사에서는 몇 문제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정묘호란에 대한 단기기억은 금방 잊혀 질 뿐만 아니라 광해군이 왜 중립외교를 했는지, 인조는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병자호란은 또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래서 동아시아에서 조선의 위상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맥락이 이어질 수 없다. 정묘호란만 암기한 학생은 눈앞에 닥친 중간고사는 잘 넘어갔을지 몰라도, 몇 년 후 수능을 대비하며 조선전기를 다시 공부해야 하는 수고를 또 한 번 하게 될 것이다. 남들은 자신의 두뇌 속에 이미 저장된 조선 전기의 장기기억 네트워크 위에 새롭게 더 넓고 깊은 학습의 결과물(지식들)로 사고의 재료들을 넓혀갈 때, 벼락치기로 초단기 암기한 학생의 결과는 시간에 쫓기며 또 다시 단기기억들로 두뇌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결국 암기 시험과 사고력 시험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학습의 본질은 과거에 저장한 지식들과 현재 사고하는 것들이 서로 연합하여 인출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암기 과목이라고 해서 암기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다. 읽고, 생각하고, 입으로 소리도 내어보고, 글로 써보기도 하면서 공부하면 저절로 기억 속에 남게 되는 것이 암기이고, 그 내용으로 암기과목 시험도 볼 수 있다. 사고력 시험은 이미 장기기억 속에 잘 저장된 나만의 두뇌 네트워크에 따라 때로는 재조직되기도 하며, 때로는 새로운 기억이 합해지기도 하면서 문제가 원하는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력 시험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수준의 지식 기반이 잘 다져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이런 장기기억들의 네트워크가 없으면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사고력 수학’이라는 학원을 굳이 다니게 하면서 아이에게 스트레스 주지 않아도, 아이의 학습으로 수학에 대한 개념과 이해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배워서 알게 된 사고력’보다 훨씬 심화 수준의 사고력 문제까지 잘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학습하면 굳이 ‘암기’라는 것을 하지 않아도 암기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이렇게 저장된 기억이 많아지면 사고의 재료가 풍부해져서 학습의 효과를 높여준다. 사고력이 풍부해지면 다음 과정의 학습에도 도움이 되고, 그것은 또 다른 장기기억으로 이어지며, 다음 차례의 사고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상호 작용하는 지식들의 네트워크는 자기주도학습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선생님이 연구한 내용을 학원 수업이나 과외를 통해 전수받고 학생은 암기만 하면 되는 수동적 학습으로는 단기기억밖에 그치지 못하지만, 자기주도학습으로 기억 네트워크를 잘 다져가다 보면 심화문제도 쉽게 풀리는 날이 온다. 이런 경험은 또 다른 동기가 되어 다음 학습으로 연결되는 강력한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