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할머니
배가 고팠을까? 허전했을까?
육상부 장거리 선수로 뽑힌 그녀는 정규수업이 끝난 후, 육상부 선수들과 함께 두/세 시간 트레이닝에 참여했다. 운동화 바닥에 못이 박힌 스파이크를 신고 운동장을 걷거나 뛸 때, 황토 흙이 파이는 그 기분이 좋았다. 장거리 선수라 굳이 스파이크를 신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것을 신고 걷거나 뛰노라면 그녀는 웬일인지 프로 육상 선수가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하였다.
두/세 시간 훈련을 시킨 후, 육상부에서는 우유를 비롯한 샌드위치를 땀범벅이 되어 훈련받는 학생들에게 간식으로 배급하였다. 그렇게 학교에서 나온 간식을 먹고도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허전했는지 그녀는 방과 후 군것질 할 용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집에서 자잘한 용돈은 할머니가 챙겨 주는 가풍이 있었다. 용돈을 받는 프로세스는 이와 같았다. 먼저, 할머니에게 어떤 연유로 인해 얼마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린다. 할머니는 장롱 두 개 사이 빈 틈에 넣어 두었던 약통 깡통을 꺼낸다. 깡통 속에 수북이 쌓여 있는 오백 원, 백 원, 오십 원, 십 원 짜리 동전 중에 필요한 동전 양만큼 할머니는 세어서 주신다.
어느 여름날 아침 그녀가 쭈뼛쭈뼛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할머니 장롱 주변을 맴돌았다. 밖을 내다보니 할머니께서는 텃밭에 난 풀들을 뽑고 계셨다. 잠시 생각하니, 일단 할머니께서 계시는 텃밭으로 가야 하고, 자초지종 말씀드려야하고, 할머니를 모셔와 장롱 사이에 넣어 두신 용돈을 주셔야 하고, 그 후 할머니께서는 다시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제초 작업을 마치시려 서둘러 텃밭에 돌아가야 하신다. 시간을 보니 몇 분 지체하면 학교에 지각할 것 같다. 다행히 동전 깡통이 있는 곳은 그녀의 작은 손이 들어 갈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두 개의 장롱 사이에 놓여 있는 동전이 든 것이라 깡통을 장롱 사이에서 꺼내어 확인을 하지 않는 이상 얼마의 동전 가치를 그녀에 손에 쥐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할머니 동전 깡통에 오른손을 집어넣어 동전 몇 개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그대로 집어넣고 학교로 향했다.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텃밭에 계시는 할머니께 등교 인사를 하지 않고 할머니를 피하 듯 쏜살같이 집에서 뛰어나갔다.
그날도 육상 훈련을 마치고 아침에 할머니 동전 깡통에서 집어 든 돈을 세어보니 합이 빵빠레 두 개 정도 살 만한 동전의 가치였다. 같이 훈련을 받은 친구에게 선심이라도 쓰듯 그녀는 친구와 하나씩 나누워 먹을 '빵빠레' 콘을 두 개 샀고, 고된 훈련 후 먹는 아이스크림이라서 그런지 피곤함도 아이스크림도 사르르 녹았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그녀는 그렇게 아침마다 자신만의 의식을 치렀다. 동전을 보고 고르는 것이 아니기에 얼마를 군것질 값으로 그녀의 손에 쥐었는지는 랜덤 운에 맡겨야 했다. 어제 야무지게 한 주먹 쥔 동전은 10원짜리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녀는 고된 운동 훈련 후 불량식품 코코아 캔디를 하나 사서 친구와 나눠 먹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녀는 하교 후 육상부 친구들과 함께 집에 도착하여 고무줄 놀이를 하였다. 그런데 고무줄놀이를 하던 나와 내 친구들을 할머니께서 배회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미 제초 작업이 끝난 깨끗한 앞마당을 할머니께서는 손을 분주히 움직이시며 새싹도 안 보이는 풀을 뽑다가 그녀를 힐긋힐긋 보셨다. 그러기를 여러 번 하시더니 그녀의 친구들이 놀이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자, 할머니는 슬그머니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가, 돈 필요하거나, 뭐 먹고 싶으면 이 할미에게 얘기 혀."
그리곤, 총총 사라지시는 게 아니신가.
그녀는 모든 게 멈춘 것만 같았다. 정황상 할머니께서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서성이시다 같이 놀던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틈에 한 마디를 남기시고 간 이유를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혹시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말씀을 하시면 그녀가 속상해하거나 창피해 할까 봐 그런 것일까. 욕 없이, 혹은 '잘했다' 혹은 '잘 못 했다'라는 가치 판단 없이 내뱉으신 그 한 마디 말씀이 그녀의 알량한 영혼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깊은 심연의 잔잔함으로 그녀의 영혼이 울렁거렸고, 그 순간 그녀의 이성과 감성은 멈추어 버렸다. 그리곤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이시며 툇마루에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시는 할머니의 은은하고 따뜻한 뒷모습에,
"나도 저 여인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