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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보 Mar 03. 2016

영화감독 김기덕의 작품<파란 대문>

자본에 의한 이분법적 '성'을 자각/각성하고 '성'의 원형을  깨우침


김기덕 감독의 영화 <파란 대문>에서 주인공 진아와 혜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다. 김기덕 감독의 <파란 대문>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 의해서 소설을 시작한다.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새는 날아가 버렸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토오루(ワタナベトオル)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소설은 끝난다. 김기덕의 <파란 대문>은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에 떠난 새와 <노르웨이의 숲> 소설의 주인공 나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답이자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을 통한 성의 사회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깨닫는 영화이다. 인간의 생물망(生物網)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김기덕의 <파란 대문>은 비틀스의 노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인물 오필리아와 연결되어 있다.





왜 제목이 파란 대문인가?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란 노래는 존 레넌의 '불륜'을 암시하는 가사로 시작한다.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은 노르웨이의 음악 페스티벌 이름에서 차용한 것으로 혹은 존 레넌(John Lennon Lennon)은 어디서 이 노래의 작명이 붙여졌는지 알 수 없지만  폴 맥카트니(Paul McCartney)는 자신이 묵고 있었던 아셀(Asher)의 집의 값싼 노르웨이 가구에서 영감을 받을 것으로 알려진다. 


비틀스가 노래로 시작한 <노르웨이의 숲>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거쳐 <노르웨이의 숲>이란 소설로 담론이 이어지고,  김기덕의 <파란 대문>이라는 영화로 연결되는 국제적 콜라보레이션은 더욱 복잡(complex)하고 동적(dynamic)이다. 


비틀스는 그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의 가사에서 "그리고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홀로였고, 그 새는 날아가 버렸다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라고 노래한다. 아래는 <파란 대문>의 초반부 장면으로써 새장 여관에 살 던 한 성, 즉 이분법적인 사회 모순의 창녀 역을 맡은 여인이 떠나면서 진아, 즉 진실된 나(眞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토오루(ワタナベトオル)가 독일 도착 행 비행기 안에서 들은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 계기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인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소설을 마친다.


그러자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어디 있어요?”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얼굴을 들고  공중전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딘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 데도 아닌 공간의 한 가운데에서 미도리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Excerpt From: Murakami Haruki. “상실의 시대.” iBooks.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나그네'라는 잡지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찾아보니 90년대  실존했던 성인 잡지였다. '포르노 사진작가의 고백'과 '유부녀의 불륜 소설 폭발적 인기'라는 헤드라인이 있다. 하지만 <파란 대문> 첫 장면에서는 일그러진 성인잡지 때문에 '작가의 곡'과 '소설 폭발적 인기'만 보인다. 이는 비틀스의 불륜을 대상으로 만든 <노르웨이의 숲>과 성적 묘사가 많이 등장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도 자본의 힘과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해 예술이 아닌 천박한 작가의 곡이나 패륜 소설로 볼 수 있다는 것을 피력하는 것은 아닐까. 


김기덕 감독 영화 <파란 대문>의 첫 장면에 나오는 90년대 실존 했던 성인 잡지 '나그네'

김기덕 감독이 비틀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하여 우리들을 <파란 대문> 안으로 초대한다.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서 날아가 버린 새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 속의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도루(ワタナベトオル)는 '파란 대문' 안인 새장 여인숙(영문 제목이자 여관 이름)에 있지라고 화답하는 듯한 영화가 '파란 대문'이다. 파란대문의 영문 제목은 '새장 여인숙 (birdcage inn)'이고 새장에 갇힌 여인들의 담론을 영화를 통해 이어나간다. 새장 여인숙이라는 여인숙의 간판을 '새장 여인'까지만 카메라 앵글로 잡은 것이 인상 적이다. 즉, 성의 이분법적 사고는 두 여인을 새장 여인으로 그리고 새장 여인숙에 갇힌 여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의 모순은 두 여인을 새장 여인으로 그리고 새장 여인숙에 갖힌 여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떠나가는 창녀와 진아의 상징성

아래의 장면은 주인공 진아와 떠나는 창녀가 부딪히는 장면이다. 자본주의 체계 안의 이분법적인 여성성을 극복하지 못 한 투피스를 입은 '떠나가는 창녀'와 이분법적인 성에서 벗어난 성을 상징하는 원피스 (드레스)를 입은 주인공 진아의 영화 속 이름은 그래서 진아, 즉 진실된 나(眞我)이고 떠나가는 창녀의 영화 속 이름은 '떠나가는 창녀'이다.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진아는 자본주의 사회 속의 이중적인 여성성을 탈피해 원래 여성성의 원형을 찾고자 하는 진아(眞我)이다.

에곤 실레의 작품과 김기덕 감독의 작품 <파란 대문>

영화 속 주인공인 진아는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 <검정머리 누드 소녀>를 들고 등장한다. 의심과 불안의 상징인 뒤틀린 형태로 인간의 육체를 표현하는 에곤 실레의 화법은 김기덕 감독의 수면 아래에서 찍은 장면들은 물의 파동에 의한 육체의 표현은 의심과 불안의 상징이 아닌 확신과 완전한 깨달음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김기덕 감독은 비틀스와 무라카미 하루키와 대칭으로 시작해 에곤 실레와 대칭을 수면의 파동과 구겨진 잡지나 사진을 사용 한 카메라 기법과 에곤 실레의 그림의 상징성을 영화의 담론을 이끌어 나간다. 이는 장르의 구분 없이 이들을 하나의 영화 안에 넣는 기법으로 비틀스의 음악,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에곤 실레의 미술,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 속 오필리아를 통해 김기덕의 영화로 발전시킨다.

김기덕 식 에곤 실레 화법은 수면의 파동 그리고 구겨진 잡지와 사진으로 뒤틀린 형태의 인간을 표현한다.

에곤 실레는 일생 동안 "예술의 에로틱한 작품들 역시 신성하다(Erotic works of art are also sacred" — Egon Schiele)"라고 주장해 왔다. 진아는 이런 에곤 실레의 주장을 대변하는 진정한 에로스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녀는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의 방에 처음 입주하자마자 에곤 실레의 '검정머리 소녀의 누드' 그림을 걸어 놓는다. 

바다와 육지가 평행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진아가 열고 들어간 파란 대문이 열리면 새장 여인숙의 이중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새장 여인숙 주인은 23살이 된 딸 '혜미'와 아들 '현우'가 있다. 진아와 혜미는 같은 23살 여성이고 새장 여인숙에 살고 있으나, 파란 대문 안에서의 역할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다. 


영화 초반부의 파란 대문 안과 밖의 구분과 후반부의 구분이  없어진 파란 대문 

<파란 대문>에서 파란 대문 안에 있는 집의 한 쪽 외관은 하늘을 그리고 담 벽은 바다를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새들은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는 하나의 공간에서 산다. 하지만, 지상에서 흉내 낸 하늘을 닮은 파란 대문 안의 파란 집의 인간들의 생활은 하나의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의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은 모순적인 세계를 드러낸다. 영화 초반부의 파란 대문 안은 싸움이 있었지만 영화 종반부의 파란 대문 안은 평화로운 새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왼편: 영화 초반부 오른편: 영화 종반부

진아가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은 파란 대문 밖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만 평온하고 평등한 존재로서의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 

영화 종반부에서 보여 준 파란 대문 안과 밖은 평온하다.

여성성의 이중성 보여주기

주인공 진아가 새장 여인장에 온  첫날 저녁 식사 중에 여인장 아주머니는 진아에게 엄마라고 부르라 부탁하지만, 진아와 동갑인 23살인 자신의 친딸인 혜미의 남자친구가 집에 오는 날, 밖에 나가 있길 바란다는 부탁을 받는다. 평소에는 손님과 진아의  기둥서방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을 때 폭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통제해 주는 친절할 여관장  주인아저씨이지만 진아는 아저씨에게 (성) 폭력과 강간을 당했다. 주인의 아들은  사진작가의 꿈을 핑계로 진아의 누드를 찍고 그 후 진아와 성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아빠와 아들은 성병 치료를 받기 위해 간 주사실 문 앞에서 마주친다. 훗 날, 진아는 여인장 주인 아들에게 누드 사진을 없애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사진작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기꾼에게 사진 필름을 넘기고 그가 찍은 사진들은 콘테스트가 아닌 '이브'라는 포르노 잡지에 실리는 사기당한다. 혜미의 남자친구는 이미 이 여인장에 들러 진아와 성관계를 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 적이 있다. 


자본으로  사고파는 여성성에 의해 진아는 손님들에 의해 성적 학대를 당하고, 기둥 서방인 개코에 의해 정신적, 성적 그리고 물질적인 학대와 착취를 당한다. 또한, 자본으로 규정되는 여성성 앞에서 여인장의 딸 혜미도 피해자가 된다. 진아의 기둥서방은 혜미의 엉덩이를 만지고, 여인장에 온 손님은 혜미를 창녀로 오인하기도 한다. 인간은 생물망으로 연결된 하나의 유기체이기에 타인의 고통은 결국 나의 고통이며, 나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기도 한 것이다. 


 

여성들 사이의 여성성 계급화

진아는 평소보다 진한 화장과 과한 헤어스타일로 나타나 "엄마, 저도 밥 주세요. 밥 달라니깐요, 엄마!"라고 요구한다. "진호 씨,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촌 언니예요"라고 혜미가 남자 친구 진호에게 말하자, 진아는 "무슨 일인지 안 궁금해요? 섹스요, 외로워서 오는 사람들이랑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거죠." "엄마, 제가  거짓말했어요?  아니잖아요!"라고 하자 여인숙 주인 엄마는 "이런 망나니 같은 년, 네가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라며 뺨을 때린다.

혜미는 평소에 진아에게, "너와 나는 신분이 달라", "내가 아무리 워커맨에 환장했어도 창녀가 몸 판 돈으로 산 걸로 음악 들을 것 같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진아의 방에 도청장치를 설치한 주인의 아들로 인해 진아는 관음증 (觀淫症), 아니 문음증(聞淫症)의 대상 그리고 자위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주인집 아들과 같은 또래 혜미는 문음증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여성성의 대상은 자본에 따라 주체와 객체가 언제든지  전도될 수 있다. 즉, 이는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에서 보인 공멸의 관계이다. 


진흙탕 속에 핀 연꽃: 파란 대문 안의 모든 구성원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

이러한 자본주의의 이중적인 여성성이  지배되는 파란 대문 안에서조차 진아는 모든 구성원들을 예술의 대상으로 승격화 시킨다. 자신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쓰는 엄마, 자신을 강간한  주인아저씨, 자신을 욕구의 대상과 자본주의의 성의 이분법으로 보는 주인 아들과 혜미는 진아에게 있어 예술의 대상이 된다. 진아는 <파란 대문> 안의 사람들을 하늘과 땅을 자유로이 오고 가는 새 자체로 보고 있다. 


진아에게 여성성의 왜곡된 표현은 오직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 <검정머리 누드 소녀>로써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토오루(ワタナベトオル)가 미도리와 같이 잠자리에 들면서 미도리의 요청에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해 준 말이, "봄 철의 새끼 곰만큼 네가 좋아"이다. <파란 대문> 영화의  시작부터 보여준 주인공 진아는 줄곧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있었다. 진아의 방에는 <노르웨이의 숲> 책, 새끼 곰 인형, 그녀의 졸업 사진, 혜미처럼 사진을 구기지 않아 처음부터  왜곡되지 않은 사진이 놓여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봄 철의 새끼 곰만큼 네가 좋아" 챕터 중


"저, 저, 뭔가 말해줘요" 하고 미도리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요,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름을 불러줘요"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나는 고쳐 말했다.

"너무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미도리는 얼굴을 들더니 나를 보았다.

"자긴 정말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해요"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더 멋진 말을 해줘요"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러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Excerpt From: Murakami Haruki. “상실의 시대.” iBooks. 


성의 이분법을 하나로 연결하는 거북이, 물고기와 진아(眞我),
그리고 하늘을 나는 새와 나비 

쓰레기 더미에 엎어진 어항 안에는 금붕어 한 마리가 힘겹게 삶을 유지하고 있고 반복을 상징하는 천 년도 더 산다는 거북이 두 마리 중 세상을 떠  돌아다니는 한 마리를 주인공인 진아가 바다에 방생하며 영화의 첫 장면은 시작된다. 거북이는 바다와 땅을 연결(유오성, 2014) 하는 종교적 상징 동물이다. 육지에 있던 거북이 한 마리를 바다에 방생하며 육지와 바다를 잇는 동물의 상징성을 보여주고, 거북이 한 마리를 육지에 놓아 둠으로써 김기덕 감독은 성의 이분법적인 요소를 잇는 영화 속의 상징물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두 번째 성의 이분법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상징으로 물고기를 사용한다. 유요한(2014)의 '종교, 상징, 인간'이란 책에서는 "시원적 종교에서 물고기는 남성의 성기와 유사한 모습으로 풍요, 생식, 새로워진 남성의 에너지, 재생들을 상징한단다. 여러 문화에서 여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이크튀스(그리스어: ἰχθύς 이크튀스[*], 대문자 표기로 그리스어: 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흔히  "익투스"라는 발음으로 잘 알려져 있고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비밀스럽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두 개의 곡선을 겹쳐 만든 물고기 모양으로 나타낸다. 또한, 그리스어: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는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님은 저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16,16 참조)의 약자라는 설도 있다."한다.


영화 <파란 대문>에서 주인공 진아는 첫 등장부터 이크튀스 목걸이를 걸고 나오며,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에 파란 의자에 앉아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생선 반찬을 먹는다. 반면에, 새장 여인숙 주인의 딸 혜미는 생선 반찬 대신 여성을 상징하는 조개과인 꼬막을 먹고 혜미의 아빠는 벽화로 물고기를 그린 후 진아와 성적 관계를 맺는다. 

세 번째 성의 이분법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상징으로 새를 사용한다. 즉, <파란 대문>을 열면 새장 여인숙이 있다. 새는 하늘과 땅을 오고 가며 이 둘을 이어주는 생명체이지만 하늘에 더 가깝다 (유요한,2014). 이러한 상징성으로 인해 주인공 진아는 새장 여인관의 아빠가 벽화로 물고기를 그릴 때, 그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곤충과 인 나비를 그린다. 



       혜미의 성의 원형을 찾는 깨달음의 과정

진아는 혜미와 같은 23살 여성이지만 혜미는 프랑스의 작가이며 철학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의 여성의 성의 사회적 억압의 상징으로 여성이 제 1의 성이 아닌《제2의 성》(Le Deuxième Sexe)으로 규정되어있음을 말하는 것을 대변하듯이 사회 안에서 제 2의 성으로  구분되어지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제 1의 성의 여성처럼 남성과 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으며 혜미 자신이 남자친구를 만날 때면 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매고 만난다. 

이분법적인 여성성의 근원은 진아가 보낸 편지 한 통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토오루(ワタナベトオル)의 어린 시절부터 여자 친구이자 그녀는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한채 자살을 하는 여인인 나오코 그리고 또 다른 여자 친구이며 사랑과 삶에 대하여 인도하는 미도리가 있고, 그것의 경계선을 나타내는 인물인 기숙사에 살고 있는 나가사와 선배가 있다. 와타나베 토오루가 미도리를 좋아하면서도 엉뚱하게 나오코에게 편지를 부치는 부분을 김기덕 감독은 그의 <파란 대문>에 인용하였다. 즉, 미도리와 나오코는 나가사와 선배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 미도리와 나오코는 와타나베 토오루(ワタナベトオル)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일러 준다. 이분법 적인 여성성은 진아가 혜미에게 보낸 편지 안에는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 <두 명의 꼬마 아가씨>로 평등하게 거울면 대칭으로 앉아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후 이어지는 장면은 진아와 혜미의 '거울면 대칭' 행동이다. 이 거울면 대칭 행동에 의해 혜미는 진아(眞我)를 찾고 그녀가 진아와 같은 한 인간임을 깨닫는다. 

진아와 혜미의 '거울면 대칭' 행동 이후, 혜미는 원형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원피스를 영화 속에서 처음 입고  등장하고 구겨서 액자 뒤에 버렸던 진아와 자신의 사진의 구김을 펴 드려다 본다. 혜미의 동생 현우가 사진 콘테스트에 제출하기 위해 찍은 진아의 누드 사진이 사기를 맞아 콘테스트가 아닌 '이브'라는 성인 잡지에  발행된다. '이브'라는 성인 잡지에 실린 진아의 누드 사진을 본 진아의 기둥서방 개코가 진아에게 성인 잡지에 판 누드 사진 값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자, 혜미는 개코의 뺨을 때리고 진아의 누드 사진이 실린 성인 잡지를 찢는다. 

혜미는 회색 원피스를 입고 해변과 바다를 잇듯이 그 경계선을 걷는 도중 '거울면 대칭' 행동의 마지막 장면 때, 진아가 착용했던 데이지  머리핀을 발견하여 그것을 들어보니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가 죽었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포즈를 진아가 취하고 있다.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는 신분차로 오필리아의 아버지의 사주로 햄릿에게서 받은 편지를 돌려주며 진실되지 않은 말로 햄릿과 헤어지고, 이 충격에 의해 햄릿은 자신이 사랑하였으나 거친 말로 오필리아와 헤어고, 그 후 햄릿의 실수로 인해 햄릿에 의해 사살을 당한 오필리아의 아빠의 사건에 의해 오필리아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자살을 하였는지 실수를 하였는지 알 수 없이 숲 속 강물에 하늘을 바라본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그린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에서 데이지 꽃은 순결과 결백을 상징한다. 햄릿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타자에 의해 종용되거나 사주되는 행동, 즉 오필리아가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햄릿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는 행동은 '매춘부'인 것이다. 햄릿에서 이 장면은 햄릿과 오필리아의 관계 속에서는 햄릿의 죽음을 오필리아의 죽음으로 인한 복선을 나타내지만, 오필리아 자신에게는 햄릿을 향한 사랑의 순결과 결백을  상징할 수도 있겠다. 


<파란 대문> 속 혜미는  꿈속에서 본 밝은 낮에 해변에서 진아의 죽음의 목격에 놀라 한 밤 중에 깨어 진아의 방문을 열고 진아가 자살시도를 한 것을 발견한다.  이는 진아 안에 혜미가 있고 혜미 안에 진아가 있듯이, 진아가 몽중의 밝은 대낮에 진아의 죽음의 목격은 성의 이중성이 사라지고 순결과 결백을 상징하는 데이지로 남는 것은 아닐지. 

김기덕 감독의 <파란 대문> 속을 오필리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장면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 그림

한 여름밤의 꿈처럼 한  여름밤에 내린 하얀 눈은 이분법으로 왜곡된 성을 이브의 시절의 성으로 되돌아 감을 의미 할 수 있지 않을까. 혜미는 한  여름밤에 하얀 눈이 내리는 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가루로 하나의 원형으로 만든다. 자본과 사회성에 의해 두개로 나누어진 성이  아닌 진실한 성의 원형을 알아낸 지의 원형적 학을 상징으로 혜미라 명명한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혹자는 '차라리 자본으로 성을 주고 파는 진아에서 여대생 진아가 되어 진실한 성의 원형을  알아낼 수 있지 않겠나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은 언어도단 그 자체이다. 이러한 가정에서 본다면 이미 질문자는 진아의 위치가 아래라는 것을 전재한 것이고, 그리하여 자본과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성의 상하 관계를 진아와 혜미 사이에서 정하는 것이다. 또한, 평등한 진아와 혜미의 성이 아닌 상하 관계의 진아와 혜미라는 전재를 의식,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갖고 있는 확률이  높을수록 혜미가 상징적인 의미로 진아의 상황에 빠져야 한다는 것에 역겨움을 느낄 수 있는 확률이 높을 수 있다. 이때 자신의 역겨움을 바라보고 역겨움의 정체를 똑바로 자각(自覺)하고 각성(覺醒)한다면 이 영화를 통해 깨달을 것이오, 역겨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깨달음과 멀어질 것이다. 그러하기에 김기덕 감독의 <파란 대문>은 이러한 자본적이고 사회적인 성의 이중성을 역설을 통해 깨달음의 미학으로 두 여성인 진아와 혜미를 통해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둘이 아닌 진아와 혜미는 성의 원형을 상징하는 자유로운 물고기를 마주 보며 <파란 대문>은 막을 내린다. 



<김기덕 감독 영화 리뷰 모음집>

김기덕 감독은 영화 <아리랑>에서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브리다』를 자신의 영화 속에 내포하였다.

<뫼비우스>에서는 소설, <위대한 게츠비:The great  Gatsby>와 <진주 귀고리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를 뫼비우스 내용과 연결시켰다. 

트레이시 슈발리에 (Tracy Chevalier)의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 속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의 '어두운 방'이란 뜻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광학 기구를 사용한 것과 같은 영화 속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활>의 구조는 '거울명 대칭'이다. 

<일대일>에서는 평등한 관계를 부르짖는다.


김기덕의 <파란 대문>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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