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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보 Mar 06. 2016

영화감독 김기덕 작품 <섬>

<파란 대문>, <노르웨이의 숲>을 포옹하는  소우주로써의 자궁 <섬>

김기덕 감독은 영화 <섬>에서 우주적인 관점으로 비틀스,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리스 신화와 인류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보여 준다. 그의 우주적 관점의 스케일은 오히려 비틀스, 무라카미 하루키,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작품을 소우주의 강변에 있는 하나의 모래알로 만들어 놓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파란 대문>에서 주인공 진아와 혜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다. 김기덕 감독의 <섬>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서 떠난 새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토오루(ワタナベトオル)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답이자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을 통한 성의 사회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깨닫는 영화이다. 인간의 생물망(生物網)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김기덕의 <파란 대문>은 비틀스의 노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인물 오필리아와 연결되어 있다.


위의 전재가 옳다고 가정할 때, <파란 대문>을 다 보고 후 저절로 생기는 의문은, "남성성의 원형은?"이라는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섬>을 보고 나서, <파란 대문>은 여성성의 이중성을 하나로 묶어 성의 원형을 찾는 작업을 거쳐, <섬>은 남성과 여성성을 넘어 인간이 소우주의 원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서 떠난 새를 김기덕 감독은 <파란 대문>에서 응답하고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코오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끝나는 소설에 김기덕 감독은 <섬>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추론이  영화 속에 화면 장면 장면에 나오는 단서들로 <섬>이 김기덕식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김기덕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섬은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며 인간을 화해로 이끄는 곳"이라 했다. 육지와 바다 사이, 그리고 육지에 있었던 <파란 대문> 속의 새장 여인관에서 남과 여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리라. <섬>은 이러한 면에서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모두 포괄한다. 


왼편 장면은 <파란 대문> 속 주인공 진아가 손님들과 성관계를 맺는 곳이고 숫자는 15이고 오른편 장면은 <섬>에서 주인공 여자 희진의 배에 쓰여있는 숫자는 16이다. 

아래의 <파란 대문> 속에서 상징하는 주인공 진아와 노란색의 연관성은 <섬>에서 주인공 현식이 영화 초반부터 후반까지  묶는 섬 위의 집의 색깔인 노란색으로 연결된다. <파란 대문> 속 진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노란 나비를 바닷속 풍경에 그리고, 혜미에게 건넨 선물과 혜미에게 건네었던 우산의 색깔도 노란색이다. 영화 후반부에 혜미가 진아에게 건넨 데이지 머리핀의 수술과 암술에서 수술은 파란색이고 암술은 노란색이다. 진아와 혜미의 화해와 여성성의 원형을 찾은 <파란대문> 종반부에서 혜미는 노란색 티를 입고 있다. 이는 마치 <파란 대문>의 주인공 진아가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두 여성  미도리와 나오코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이 아닐까.

<파란 대문> 속 노란색

아래는 영화 <섬> 속 주인공 현식이 머무는 섬 속의 집은 노란색이며 현식은 새장 안에 한 마리 새를 들고 이 섬에 나타난다. 이것 역시 영화 <파란 대문>이 <섬>과 하나로 연결된 영화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또한,  <파란 대문>의 주인공 진아가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토오루(ワタナベトオル)를 섬 속에 연결시키는 장치는 아닐까. <섬> 속 주인공 현식은 새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새장을 자신의 품안에 품고 16번 배를 타고 노란 집에 도착한 후 집 앞에 새장을 걸어 둔다.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이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은 또 다른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의 탄생과 연결이 되어있다면, 노르웨이의 숲은 김기덕 감독에 의해 새장 여인관으로 탈바꿈되고, 더 나아가 <섬> 안의 또 다른  숲으로 탄생한다. 그리하여, 김기덕 감독은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숲을 자신의 영화 <섬> 안에 포옹한다. 

김기덕 감독 영화 <섬> 안의  또 다른 숲

김기덕 감독의 <섬>은 처절하게 아름답다. 처절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 처절하다.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처절한 아름다움에 흡수되게 하고 우리 자신이 더욱더 큰 섬의 존재가 되고자 함을 자처하게 한다. 한자로 <섬>도 결국에는 <도>가 아닌가. 이러한 면은 노인과 소녀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그의 영화 <활>과 비슷하다. 

소우주(小宇宙)로써 존재하는 희진

영화 <섬>에서 섬 안에 들어온 주인공 남자 현식은 <서유기>의 손오공이 삼장법사의 다섯 손가락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주인공 여자 희진의 한 부분으로써 존재하며, 희진은 결국 섬, 즉 대우주의 자궁의 한 부분이다. 

주인공 희진은 자본과 권력으로 파편화된 성에서부터 신성한 영혼의 치유로써 존재하는 탈근대적인 소우주로서의 희진이다. 그래서 그녀는 저녁에 섬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 돈을 주고 몸을 팔 수도 있으며, 현식의 영혼을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탈근대적인 매춘부 퍼포먼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계보를 신성한 매춘부에 두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근대적 매춘부의 구성 양식을 침식시키고 제거하는 하나의 전략적 계보학을 생산했다. 그들의 계보를 추적하는 이 장은 서양철학의 최초의 여성들인 디오티마와 아스파시아를 고대의 신성한 매춘부의 세속화된 유물인 헤타이라로 복원시킨다. 

나의 읽기는 해학적 유물이자, 철학적 현존인, 즉 남성의 정치적 서사에 대한 여성적 단절자인 아스파시아를 복구시킨다. 서양철학의 최초의 여성들(영혼의 지도자이자 창녀인 디오티마와 세속화된 정치적 매춘부 철학자인 아스파시아)이 다시 불러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성과 젠더, 내부와 외부에 그어진 몸의 경계선들이 느슨하게 정의되는 탈근대성의 공간 속에서이다. 나는 쾌락과 지식을 동시에 주고받는 일을 가르쳤던 디오티마를 육신이 영혼과 근본적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여신의 현현(顯顯)으로 읽는다.(출처:Shannon, 1994; 번역 : 승준(linio))


현식을 사이에 둔 은아와 희진 그리고 그리스 신화 속의 메두사(Medusa)

이러한 희진의 성격은 포세이돈을 사이에 두고 아테나와 경쟁하는 메두사(Medusa)와 닮았다. 영화 <섬>에서는 은아가 희진에 의해 자살 혹은 은아의 실수로 익사한 은아의 오토바이와 은하를 수장한 후 그것들이 가라앉는 모습을 섬의 물속으로 머리를 넣어 지켜보는 희진은 그리스 신화의 섬에서 태어나고 섬에서 자란 메두사와 닮았다. 


영화 감독 김기덕의 <섬> 속 희진

메두사는 흔히 악녀이며 머리카락이 독사로 되어있고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돌이 되어버리게 한다는 괴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메두사의 현대적 관점은 아래와 같다. 


메두사는 본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지혜의 여신이었다. 고대 근동 문명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뱀을 머리에 두른 메두사는 신과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또 누구도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나는 죽음이므로 나의 얼굴을 봄은 곳 그 존재의 죽음을 뜻하며 돌로 변함은 무덤의 비석을 의미한다. 누구도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므로..."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메두사는 자신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죽음 또한 관장하는 여신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메두사는 자신을 이미 존재한 것, 존재하는 것, 존재할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메두사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순환하는 여성의 몸과 그에 따르는 지혜를 상징한다. 여성의 몸은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수용하는 한편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소유하고 있음에 대한 암시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메두사의 지혜는 남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결코 남성이 소유할 수 없는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s)의 메두사 두상의 두려움의 표현과 다른 분노를 연상케 하는 김기덕 스타일의 메두사로서 희진의 모습을 표현한다. 

왼편, 중간의 장면은 김기덕의  <섬>에서 오른편 베르니니(Bernini's)의 동상을 연상케 하는 메두사와 닮은 희진의 모습

1981년에 개봉된 영화 <타이탄 족의 멸망: Clash of the Titans)에서 메두사의 섬은 두 개의 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는 디오스킬로스 (Dioskilos)라는 개가 지키고 있고, 희진이 살고 있는 섬에는 한 개의 머리인 개가 희진과 같이 살고 있다. 

영화 감독 김기덕 <섬>의 희진의 섬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개 한 마리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는 여러 예술가에 의해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메두사는 1598년경에 나무 방패에 유화로 그린 작품이다.   그의 메두사의 특징은 목이 잘렸으나 생동감이 있고 공포에 질린 모습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자아내는 특징이 있다. 

왼편은 베르니니(Bernini's)의 메두사 오른편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작품


터키 예레바탄 지하 궁전에 있는 물 저장소 [Yerebatan Basilica Cistern] 기둥 하단부에 거꾸로 그리고 가로로 놓여 있는 메두사는 김기덕 감독에 의해 섬의 물 밑에서 바라보는 시선에서 보는 메두사로 새로 태어난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Basilica_Cistern)

그리스 신화에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죽음 또한 관장하는 여신인 메두사는 가부장제 안, 즉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또 다른 지혜의 상징인 아테나의 분노로 페르세우스를 도와 두상이 잘라진 채로 죽임을 당하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김기덕의 <섬>에서는 그리스 신화 속의 메두사의 한계를 벗어난다. 그녀는 김기덕 감독에 의해 생명의 근원이며 죽음을 관장하는 근원성으로 재림한다. 


<섬>에서 은아는 망치에 의해 그녀의 행동이 제어되지만 희진의 행동은 완전한 생명의 근원이며 죽음을 관장하는 소우주처럼 주체적이다. 이는 마치 아테나가 아버지 제우스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성이 있지만, 메두사는 죽음과 생명을 관장하는 지혜로운 인물로서 육신이 영혼과 근본적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인물과 같다. 그리하여 오직 희진 만이 영화 <섬> 안에서는 주인공 남자 현식을 죽음, 즉 자살과 경찰의 위험에서 구해주며, 자신을 모욕했던 손님에게 복수를 하며,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새의 먹이를 위해 땅과 물 사이에 사는 개구리를 죽일 수도 있으며, 먹이를 주었던 새를 섬 속에 수장시킬 수 있으며, 현식과의 관계의 어긋남은 섬을 지키는 개를 섬으로 끌고 가 폭행을 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현식이 은아와 잠자리를 한 후 희진은 물고기를 전기로 가학 하고 은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물고기를 물속에 수장하는 주체이자, 은아와 망치를 죽음으로 유도하여 섬 속에 수장시킬 수 있다. 즉, 섬 안에서 희진은 삶과 죽음을 관장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지혜의 여신으로서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메두사처럼. 


물고기의 다른 의미

현식과 희진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는 섬 안에 온 사람들이 '물고기'가 성적 욕망을 상징한다면, 현식에게 있어서 물고기는 삶의 의지의 변화를 나타낸다. 영화 초반부에 현식은 물고기 모양의 철사를 낚시에 끼워 놓는 것은 삶의 대한 무의지이고, 희진에 의해 죽음에서 벋어 난 그는 방안에서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것은 삶의 대한 의지를 나타내며, 은아와 개코를 죽인 후 잡은 물고기의 난도질은 삶의 대한 가학이며,  살집이 잘린 물고기는 자신의 삶의 상처를 의미한다.   



현식과 희진

현식과 희진은 각자 개별로 존재할 수 없다. 현식은 희진의 머리로, 희진은 현식의 근원적인 생명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현식의 머리 부분에서 나오는 낚싯바늘은 3개가 맡닫는 점은 있지만 흩어져 있고, 희진의 자궁에서 나온 낚시 바늘은 낚시 바늘 하나가 두개로 연결이 되고, 그것이 사랑으로, 즉 진정한 삶과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희진에 의해 육신과 영혼의 만남을 갖은 현식은 처음으로 섬의 숲에 가는 경험을 하며 아담과 이브가 처음 에덴동산에서 사과를 베어 문 것처럼, 그들도 사과를 베어 문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사과를 먹었다면, 현식과 희진은 선과 악의 구분의 이전, 육신과 영혼을 하나로 보는 지혜의 과일을 먹은 것이다. 

노란색과 꽃

김기덕의 <파란 대문>에서 주인공 진아와 혜미의 서로가 파편적이 아닌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노란색으로 그리고 꽃을 주는 것으로 표현했듯이, 영화 <섬>에서도 현식은 섬에서 탈출을 시도한 후 돌아와 노란색으로 집 벽을 희진이와 같이 칠하고 희진에게 꽃 한 송이를 선물한다. 

꿈에서 깬 현식과 우리들  

깊은 선정(禪定)의 상태는 잠을 자는 듯하지만 고요하고 역동성의 에너지가 감도는 상태이다. 이는, 마치 아주 심연한 역동,  즉 깊은 물속에 잠겨있는 소우주적 상태와 이런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대우주적 의식이 만나는 심연우주 (深淵宇宙)의 상태와 같다.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자신 내면 깊숙이 시나브로 묵혀 두었던 내면의 추악함의 요동(섬에서 일어났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한 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에 그것에서 벗어남이 가능할 것이리다. 


<섬>에서 소우주의 내부에 흡수된 것들이 또 다른 나인 경찰과 손님에 의해 꺼내지는 것을 목격한 주인공 현식과 희진은 망망대해(茫茫大海)로 떠난다. <섬>에서 현식은 바람 핀 애인과 상대 남성을 죽인 전직 경찰이며 섬에 들어와 그 기억에서 벋어나 소우주인 희진과 만나니 한 번 깨달은 것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현식은 희진과 만난 것 조차도 자신이 소우주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 나서 어리둥절 하는 모습은 섬에서 있었던 일이 구운몽과 같은 또 하나의 꿈임을 알아차리니 2번 깨닫는 것이다. 이 장면은 <파란 대문>에서 주인공 진아와 혜미가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나, 즉 와타나베 토오루(ワタナベトオル)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김기덕 식 답일 수도 있겠다. 현식은 다시 섬안의 숲에 들어가고 결국 숲은 여성, 즉 소우주의 한 부분이라 는 것으로 3번 깨닫는 것이고, 배 안에 존재하는 소우주인 희진도 결국 하나의 거대한 또 다른 대우주의 일부와 서로의 만남으로써 존재하기에 4번 깨닫는 이야기다.


이로써 김기덕 감독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비틀스, 무라카미 하루키,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리스 신화와 인류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스케일은 오히려 비틀스, 무라카미 하루키,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작품을 소우주의 강변에 있는 하나의 모래알로 만들어 놓았다. 


<영화 감독 김기덕 작품 리뷰 모음집>

김기덕 감독의 영화 <파란 대문>은 비틀스,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소재를 사용했다. <파란 대문>은 <섬>과 내용이 연결되어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활>도 깨달음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고, 영화의 세팅도 <섬>과 비슷하다. 하지만, <활>은 동양사상인 주역과 불교사상을 사용한 반면, <섬>은 그리스 신화를 사용했다.

김기덕의 <섬>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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