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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그리고 우리

존중의 시작

by 열정적인 콤플렉스

사람은 본능적으로 '나'를 우선시한다. 계몽의 과정을 거쳐 동굴 속 야만과 미신의 시대에서 벗어나 빛이 존재하는 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진화의 역사에서 생존 본능에 의존해서 살았던 시간이 훨씬 더 크다. 그러니 타인을 위한 희생과 양보는 커녕 타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특히,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경우라면 상대 의견과 존재에 대한 인정은 곧 나의 약점이 되고 경쟁에서 패배를 의미한다. 그러니, 다투고 싸우고 미움이 담긴 말을 먼저 꺼낸다. 이는 최근 우리가 겪고 있는 극단의 대립의 시초가 되고 근복적인 이유가 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혐오와 저주를 담은 말과 행동을 끊없이 늘어 놓는다.



학생들을 토론에 참여시켜 보면 작은 사회의 축소판을 볼 수 있다. 토론을 이기고 지는 '말싸움'이라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토론의 본질은 나의 의견에 따르도록,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최소한 서로의 의견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에 있다. 상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생각의 이유와 근거가 무엇인지 안다면 더 큰 갈등과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 왜? '도무지 나와는 상극의 사람이니 더 이상 부딪히지 말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부딪힐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토론에서 의견 선택이 자유 의지가 아닌 무작위 배정임에도, 심지어 평소 본인의 생각과는 다른 의견을 주장해야 하는 팀에 배정이 되었을지라도 토론이 시작되면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토론을 지배하고, 나의 의견이 전달되지 않고 묵살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하는, 원했던 이야기를 하면 '왜 갑자기 바꿨느냐?','무슨 의도로 그러느냐?'가 묻는 세상이다. '너는 그렇구나.'가 아니라 '넌 나랑 생각이 다르네. 그럼 너는 XXXX.'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편 가르기를 위한 선명성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이상한 메커니즘이 작동하면서 이런 모습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보편적 가치, 과학 질서와 원리에서 조차 이성이 아닌 감정과 이념적 기준이 우선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나, 나, 나, 나.... 이렇게 모여서는 우리가 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나'는 하나 뿐이다. 내가 낳은 자식, 유전자가 99.99%일치한다고 하는 자식도 '나'가 아니다. '너'일 뿐이다. 하물려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존재들 중에서 계속해서 '나, 나, 나, 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너'가 필요하다. '너'는 나와 생각이 다르고 판단 기준도 다르다. 하지만, '너'가 나의 존재를 해치지 않을 것이고 나와 일정 부분 가치와 질서를 공유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몸 속에 흐르는 생존의 DNA가 너를 적으로 인식하려고 할지라도 함께 있어야 나의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이성적 판다늘 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나' 그리고 '너'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식과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 너는 우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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