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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말 내일은 어디 갔을까?

by 열정적인 콤플렉스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일이 언제냐는 꼬마 아이의 질문에서 망상에 가까운 생각으로 시작했다. 내일 장난감을 사러 가자는 말에 하루 종일 엉덩이 뒤를 따라다니며 언제 사러 가냐는 질문의 반복과 그럼 '내일은 언제 오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아이에게 내일을 설명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제자리에서 맴도는 느낌만 남았다. 깜깜해지고 '코'하고 자고 일어나서 해가 뜨면 내일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아이는 오늘 '코'자고 일어나서 해님하고 인사했으니 그럼 오늘이 내일이냐고 다시 물었다. 아이와 꼬꼬무가 반복되면서 '정말 내일이 있나?'라는 망상에 잠시 빠져본다.



내일이 없으면, 더 이상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이고 소멸이다. 이 아이의 미소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망상이 극단으로 가면서 내일이 없다는 '소멸'로만 이어졌다. 아이에게 달력의 가리키며 숫자의 변화로 내일을 설명하려고 애쓰며 부질없는 망상을 몰아냈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현재의 수행과 업, 관계를 중시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허황된 망상뿐이고 계획과 실천이 없어 실체를 알 수 없는 내일을 쫓기보다는 주어진 지금에 충실하는 것이 삶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 맘대로 보내도 된다.'는 말과 행동, 마음가짐에 경고를 하는 의미다.



순수한 우리말에는 어제와 오늘이 있다. 하지만, 내일(來日)만 한자어다. 오늘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시절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우리가 과거지향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와 우리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나온 말이고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식민미화와도 맞닿아 있으니 내일을 한자어로 쓴다고 해서 이를 우리의 민족성과 연관 지을 수는 없다.



현재의 우리가 내일을 순수한 우리말로 사용하지 않을 뿐 내일을 의미하는 우리말이 있었다는 자료는 얼마든지 있다. 말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마저 당연한 것이니 존재하던 말의 사용빈도가 인기가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지금의 내일이 된 것뿐. 새 · 하늬 · 마 · 높'이라는 본디 우리말이 '동 · 서 · 남 · 북'으로 바뀐 거와 같다.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우리 국어에 '한자어'가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언어는 생물처럼 시대와 사회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생성되고 소멸되는 삶의 순환을 자연스럽게 겪으며 오랜 시간을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새, 하늬, 마, 높이 동서남북으로 바뀌고, 동서남북을 사용한다고 해서 사방을 의미하는 우리말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동서남북을 한자어로 사용한다고 해서 민족성이 어떻고, 방향성이 없는 민족이라고 비관적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한국어의 놀라운 표기능력은 거의 전 세계 언어를 가져다 쓸 수 있다. 국어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훼손한다며 외국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운동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나영석 PD의 예능프로에서 다양한 게임을 하며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시합을 한다. 하지만,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너무나 자연스럽게 외래어가 튀어나오고, 그 외래어가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거나 상황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 속에 외래어는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아름다운 우리 고유어와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분명히 아쉬움이 있고 연구와 실생활 속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이 이어져야 하는 것은 맞다. 언어가 민족정신과 문화를 대표한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특정한 단어의 자리를 외래어가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내일'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 말이 없다는 이유로 과한 억측을 하는 것은 불편하고 불쾌한 마음만을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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