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선택지, 그리고 마음이 기운 곳
문득 깨달았다. 또 이렇게 긴 시간을 쉴 수 있는 시기가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을.
'그렇다면 떠나야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여행하려던 엄두조차 안 났던 것을 보면, 이제는 조금 회복이 된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 고민이 생겼다.
'도대체 어디를 가면 좋을까?'
내 첫 유럽여행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였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드디어 해외여행을 결심했을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조금 어이가 없다. 엄마가 사주를 보고 와서는 거기서 나를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해외에 내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이유로 못 가는 게 말이 돼?"
질문을 해놓고도 좋다는 것은 안 믿어도, 안 좋다는 걸 굳이 해야겠냐는 엄마의 말에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함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고 생각하지만) 하고 있던 과외를 몇 주 간 빼먹는 것도 영 기분이 찝찝했다는 핑계를 댔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결국 대학교 8학기를 모두 마치고, 2월 25일이었던 졸업식 이전에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겨울 여행이니 따뜻한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네이버와 주변 후기를 들어봐도 스페인에 대해서는 모두들 극찬 투성이었기 때문에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첫 여행지를 정했다. 그렇게 마드리드 인 로마 아웃 항공권을 끊었던 기억이 있다.
그 뒤의 유럽행도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보고 싶어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있는 나라들을 가고 싶어서 독일과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그리고 그다음에는 비긴 어게인 버스킹으로 유명해진 포르투갈을, 그다음에는 미국에서 같이 지냈던 언니 형부를 만나기 위해 스웨덴을 다녀왔다.
그래서 이렇게, 활짝 열린 선택지는 처음이다.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고, 동행인도 없는 완전한 오픈 상태. 리스트에 있었던 장소들을 고민해 봤다.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남부, 혹은 북부...
그러다 문득 파리가 떠올랐다.
사실 파리는 이미 다녀온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마켓 투어를 하던 그 겨울에 말이다. 파리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꼭 가고 싶었던 도시였다. 고등학교 시절 텐바이텐 같은 문구 웹사이트에서 포토카드가 유행이었을 때, 나는 늘 파리 테마의 포토카드를 샀다. 거기에 있는 풍경들이, 에펠탑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다녀온 파리는 기대와 달랐다. 무언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가기 전부터 겁을 먹어서 그럴까, 아니면 그 겨울의 파리가 너무 어두웠어서 그럴까. 중간에 다녀온 몽생미셸과 그 뒤로 옮겨간 스트라스부르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데, 파리의 인상이 흐릿했다.
'음... 파리를 다시 가볼까?
파리가 다시 떠오른 이유엔 아마 친구들 영향도 있을 거다. 친한 대학원 선배인 라니는 이미 파리 근교에서 한 달 반 살기(?)를 했고, 또 다른 아주 친한 대학원 선배인 발렌틴의 부모님이 지금 파리에 계셔 발렌틴한테 파리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래서 내적 친밀감이 좀 생겨버렸다.
하지만 파리와 크로아티아(의 어느 도시)를 양손에 놓고 저울질을 하다 저울이 파리로 뚝 기울어버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베르니.'
모네의 그림을 아주 좋아한다.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그림이 빛의 산란과 모네가 느낀 그 색감들이 좋다. 그리고 그 대표작들은 단연코 수련들이고, 그 그림들이 그려진 장소인 지베르니라니. 그것도 봄의 지베르니라니.
오죽하면 내 그림계정의 인스타 아이디가 봄빛파스텔이겠는가.
모네의 정원에서 실제로 피어난 수련들을 보고, 그가 매일 아침 산책했던 길을 걸으며, 그 유명한 일본식 다리 위에 서보고 싶었다. 봄빛이 스며든 지베르니에서 모네가 보았던 그 색깔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파리에 가기로 했다. 그것도 편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