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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첫날밤

일회용이라는 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by 지혜

난생처음 보는 집주인이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집에서 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마주쳐서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주인이 "오시느라 힘드셨죠?"라고 물었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대답했다.


"아니에요. 알려주신 덕분에 그래도 잘 왔어요. 그리고 역에서는 어떤 분이 도와주셔서 잘 내려왔어요"

"그쵸? 여기가 그래도 여기가 살만해요."

"그래요? 살만 한가요?"

"네. 올림픽 지나고 확실히 정리가 많이 됐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소매치기 이런 거 좀 무서웠거든요."

"아.. 소매치기요? 그건 늘 조심하셔야죠. 가방 꼭꼭 잘 챙기시고."

"아 그런가요? 혹시 당하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여러 번. 백팩 통째로 잃어버린 적도 있어요. 노트북 이런 거 다 들었는데."

"네? 현지인들도 당해요?"

"현지인 중에 안 당한 사람 거의 없을걸요?"


네...? 그때 당시 내 동공을 볼 수는 없지만 동공지진이 일었을 확률 100프로. 내 복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파리에 오시면 뭐가 하고 싶으셨어요?"라고 집주인이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아무 계획도 없었으니까. 다음 날 어디를 갈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집주인은 집 여기저기를 설명해 주었다. 바깥 쉐이드는 어떻게 올리는지, 집에서는 무엇을 쓰고 무엇을 먹어도 되는지. 그리고 화장실의 세면대는 원래 이상하다는 것과, 쓰레기는 어떻게 버리면 되는지. 이런 부분을 설명해 주고 떠났다.


집주인이 떠나고 나서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에어비앤비랑은 느낌이 좀 달랐다. 그동안 다녔던 에어비앤비는 집 전체를 빌리거나 게스트룸으로 마련해 둔 방 한 칸을 내가 온전히 차지하고 지냈다면, 이번 숙소는 정말 그 사람이 살던 공간에 들어가서 사는 거였다. 얼마 전에 방영한 TV프로그램 "마이네임이즈 가브리엘"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TV처럼 내가 그 사람의 삶까지 대신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삶의 공간에 들어가는 건 느낌이 이상했다. 그 사람과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어도, 그 공간을 바탕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게 된다.


칠 평 남짓 한 아담한 방이다. 그래도 이 방 테라스에서는 멀리서 에펠탑이 보인다. 덕분에 파리에 오자마자 에펠탑을 볼 수 있었다. 집주인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크진 않은 공간이지만 집을 돌아보았다. 운동선수 사인이 붙어있는 태극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작년 올림픽과 무슨 관련이 있겠거니, 여러 종류의 리큐르를 보며, 기념품으로 받은 컵을 보며, 또 하나의 추측을 더한다. 그리고 벽에 붙어있는 여러 쪽지들을 보며- 이 집주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소파베드에 앉았다.


푸톤이라니, 미국에 처음 도착한 날 누웠던 푸톤이 생각났다. 무슨 생각으로 그 푸톤을 졸업하는 언니에게서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그래도 첫날 카펫바닥에서 잠들지 않고 그 푸톤에서 잠들었다. 1년쯤, 집에 가지고 있다가 불편해서 결국 버리게 되었지만.


그때 생각을 잠깐 떠올리고는 누웠다.


'음... 이불은 안 빨아주셨구나. 본인이 안 찝찝한가?'


아마도 지금 세탁기가 고장 났다는 것과 연관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내일 아침엔 테라스에 가서 이불을 좀 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은 뭘 하지? 나는 그냥 정말 파리에 살고 싶었던 걸까, 뉴스레터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서관을 찾아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내려뒀다.



한참을 누워 있다가 씻고 친구들하고 하기로 한 교환 독서 책을 몇 장 읽었다. 골라온 책은 김영하 작가의 신작 ‘단 한 번의 삶’이다. 책 서문에 삶은 일회용이라는 말이 나온다. 맞지. 삶은 한 번뿐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다. 이 한 번뿐인 삶을. 내게 199x 년에 주어진 일회용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당장 내게 주어진 파리에서의 이 한 달은 어떻게 지내고 싶은가.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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