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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 한마디 못해도 파리가 좋았던 이유

못 알아듣고 못 읽는 데서 오는 자유로움

by 지혜

올해 초부터 뉴스레터를 쓰고 있었는데, 파워 즉흥형인 내게 레터의 여분은 없다. 매주 매주 그때그때 쓰는 하루살이, 아니 한 주 살이의 삶이다. 레터가 나가는 시간은 수요일 오전 9시. 파리 기준으로는 수요일 새벽 2시다. 도착한 날이 월요일 밤이었는데, 비행기에서 레터를 마무리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이루지 못했다. 첫날이었던 월요일 밤에는 도저히 너무 피곤해서 마무리를 할 수 없었고, 화요일이 되었다. 낮에는 파리의 첫날을 알차게 즐겼으니 몇 가지 장을 본 것을 들고 숙소에 들어가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첫날 본 장. 어쩐지 라면과 밥이 먹고 싶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가면 미테랑 도서관이 있었다. 주간에는 유료지만 오후 5-8시 사이에는 무료로 개방이 된다고 해서 느지막한 오후에 가보겠다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미테랑 도서관은 미테랑 대통령시절에 시작된 프로젝트라 대통령의 이름을 만들어졌다고 했다. 파리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서관이라고도 했다. 책을 90도 모양으로 펼친 모양으로 생긴 건물이 네 개가 있다.


몽마르뜨에서 바라본 미테랑 도서관

.... 이 중에 나는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 거지? 출입구를 찾는 게 조금 미로 같았지만, 덕분에 큰 부지를 한 바퀴 돌았다. 빌딩이 꽤 커서 멀리 몽마르뜨 언덕에서도 이 미테랑 도서관이 보인다. 네 빌딩들 가운데 정글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일부러 다듬지 않는다는 정원이 보인다. 그 옆으로 내려가 출입구를 찾았다.


도서관에 들어가기 위해 보안검색대를 지났다. 도서관을 들어가는 데 보안검색대라니. 새삼 치안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인포메이션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갔다. 앞에서 직원분이 다른 손님들과 함께 대화를 하고 있는데, 나는 불어는 하나도 몰라서 멀뚱히 있었다. 그러다 직원분이 내게도 무어라 말을 건넸는데, 느낌상 '여기서 공부하려고?'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끄덕거렸다. (아니면 어쩌려고 이렇게 대책 없는 짓을...)

다행히도 내 눈치가 맞았나 보다. 오후 5시부터 8시 사이에 쓸 수 있는 티켓을 내어주셨다. 그것도 5년짜리.

5년은 걱정 없는 거 맞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일단 한국어가 아닌 건 뇌도 인식을 했는지

"때..."

Thank you가 나올 뻔했다가 '아 이건 아니지'하고 정신을 차린 뒤

"그.."

Gracias, Grazie가 나올 뻔했다. 그러다 '이것도 아니지'하고 나니 그 뒤에는 타이밍을 놓쳐 인사를 영영 못 해 드렸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Merci beaucoup는 정말 입에 붙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것이 낯설고 무서울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당황스러우면서도 즐거웠다. 눈치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들을 계속 마주했는데도 그저 즐거웠다. 현실을 떠나와서 그런 걸까.


아니, 못 알아듣고 못 읽는 게 자유로웠다. 조금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모든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것 같이 느껴졌달까.


한국에서 길을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이 들린다. 아이들의 귀여운 말을 들을 때도 있지만, 현실은 누군가의 짜증을 듣는다거나 쓸데없는 가십을 듣게 되기도 한다. 그런 말들이 모두 소음으로 들리고 스트레스로 남는데, 여기서는 아무 말도 못 알아들으니 들어오는 정보가 없다.


길거리에 쓰여 있는 간판도 표지판도 알파벳으로 쓰여 있지만 아는 단어가 거의 전무하기에 그저 그림과 다를 바가 없다.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현저하게 줄어드니 그게 자유롭다 느껴졌다. (이 부분은 나중에 영국에 갔을 때 차이가 확 와닿았다. 영국에서는 다시 간판도 표지판도, 사람들이 하는 말도 들리기 시작하니 조금 더 소란스럽고 풍경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발등에 불 떨어진 레터가 급해, 도서관 구경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쩐지 파리에 와서 마음이 편해져 꽤 마음에 드는 레터를 예약했다.


한국에서도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었는데, 혼자 그것도 아무 말도 못 알아듣는 이곳이 자유롭고 마음이 편하다니 아무래도 한국에선 스스로에게 눈치를 줬었나 보다.


이 자유로움을 맘껏 누리다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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