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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는 말이 부족했던, 봄의 파리

파리의 겹벚꽃

by 지혜

역시, 시차적응.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해가 뜨기 전에도 눈이 떠져서, 조용히 일출을 기다렸다. 시차적응을 곧잘 하는 편이라, 이런 날도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안다. (실제로도 이 날 이후로 일출을 본 날은 없다.) 아직 하늘이 붉어지기 전이라 잠시 기다렸더니, 붉게 물드는 파리를 만났다. 붉어지는 에펠탑이라니, 그리고 그걸 담을 수 있는 아이폰이라니. 새로 아이폰을 구매해서 오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어디를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벚꽃이 피는 계절이니 꽃을 보러 나가야겠다. 봄은 너무나도 짧아서, 하루하루가 달라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계절이다. 인터넷도 찾아보고, 챗지피티에게도 물어보고 이내 후보를 정했다. 그렇게 멀지 않은 Jardin des Plantes 식물원에 있는 겹벚꽃이 엄청 크다고 하니 거기를 가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제 친구가 아주 부자동네에 살았는데도, 집이 털린 적이 있어요.'라는 집주인의 말을 기억하며 문을 꼭꼭 잠갔다. 집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다 보니 빵집이 보였다. 프랑스에 왔으니, 빵은 먹어야지! 빵집에 가서 빵들을 구경하는 데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일단 저건 키쉬같이 보이니까 하나 짭조름한 걸 먹고, 아몬드 크로와상도 유명하니 하나 먹어야겠다. 놀랍지 않지만, 직원들이 영어를 하지 못해 몸짓으로 주문을 했다. 주문을 다 했는데, 직원이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나도 역시나 모르겠다. 눈치껏, 데워준다는 말인가? 싶지만 혹시 또 몰라 그냥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눈빛으로 직원을 쳐다보았다. 직원이 전자레인지 앞으로 가서 손짓을 한다. "아, 예스"라고 대답하고 끄덕거리니 키쉬를 데워주었다.


배가 고픈 참이라 근처 공원에 가서 앉았다. 다들 출근 중이라 열심히 걸어 다녀서 공원에는 아무도 안 앉아있지만, 나 혼자 벤치에 앉아 키쉬를 베어 물었다. 음.. 키쉬는 원래 이런 맛인가? 연어 키쉬여서 살짝 비린 맛이 느껴진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 먹은 음식이라 좀 아쉬웠지만, 아쉬운 대로 아몬드 크로와상을 먹어본다. 아침에 먹는 크로와상은 더 버터리한 기분이다. 안에 아몬드 필링이 아주 가득 들었다. 키쉬가 생각보다 배가 불렀는지 많이 먹지는 못하겠어서 다시 종이에 잘 싸서 가방에 넣었다. 프랑스는 비닐봉지가 아니라 유산지 같은 것 사이에 빵을 넣어주는데, 물론 그게 빵이 눅눅해지지 않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만, 이렇게 포장을 해야 할 때는 난감하다. 심지어 크로와상같이 기름기가 많은 빵은 더더욱. 가방에 묻어나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이 들지만, 선택지가 없다.



일어나서 다시 Jardin des Plantes로 향해본다. 빛이 아직 지평선에서 멀지 않아서 노랗다. 사선으로 들어오는 빛은 풍경을 한층 더 느낌 있게 만들어준다. 여유로운 공원에서 비둘기 구경도 하며 걷다 보니, 핑크색 겹벚꽃이 보인다. 파리에서 제일 큰 겹벚꽃이라고 하더니, 정말 엄청 크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작아 보일 정도로. 겹벚꽃은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많아지고 있긴 하지만, 더 흔한 왕벚꽃과는 다르게 잎이 폼폼처럼 여러 겹으로 되어있다.

겹벚꽃을 볼 때마다 어렸을 때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렸던 내게는 이렇게 여러 겹으로 되어있는 꽃이 카네이션뿐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집에 오는 길에 핑크색 꽃이 가득 달려있는 나무가 있었다. (이 기억이 이렇게 생생한걸 보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꽃을 좋아했나 보다.) 그 나무를 보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엄마! 카네이션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어!"라고 말했다. 엄마가 그때 카네이션은 나무에서 피지 않는다고 벚꽃일 거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벚꽃 = 왕벚꽃'이었던 내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겹벚꽃을 카네이션이라고 믿었던 기억이 있다.


여튼, 다시 돌아와서. 한 나무가 이렇게 클 수 있을까? 운이 좋게도 겹벚꽃은 지금 절정이다. 친구와 사진을 찍고, 배우자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 사람들의 설렘, 미소가 내가 파리에 도착했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내 사진도 부탁해서 남겨보지만, 이 큰 크기의 꽃을 잘 담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꽃이 화려해 나는 보이지도 않는다.



걸어 다니는 길에 보이는 풍경들마저 다 예뻐 보이는 것은, 내가 지금 파리에 와서 설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예쁜 걸까. 지금의 파리는 내가 사랑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긴 겨울을 견뎌내고, 나뭇가지에 물이 차오르는 시간을 지나, 드디어 도시가 연두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느껴지는 생명력은 감동이다. 연둣빛으로 빛나는 잎이 반갑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연둣빛 새싹들과 동시에 여러 꽃들로 물드는 봄은 황홀하다. 지하철을 타고 온 트로카데로 광장도 겹벚꽃과 함께 핑크색으로 물들었고, 에펠탑을 배경으로 센 강 위의 윤슬이 반짝인다. 그 풍경을 즐기러 앉아있는 사람들, 잠깐 쉬어가는 사람들,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며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긴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오르세 박물관을 지나 튈르리 공원에 도착했다.


온동 연두색으로 물들고 있는 나무들과, 루브르 성을 배경으로 피어난 튤립과 이름 모를 꽃들. 내가 만난 봄 중에 가장 예뻤던 봄이 아닐까. 정신없이 사진과 영상을 남겼다. 풍경 안에 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사람들의 얼굴 안에 피는 웃음, 헤드폰을 끼고 혼자만의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 햇빛 아래 부서지는 아이들의 웃음들. 이런 풍경들을 보며 걱정으로 가득하던 내 마음도 조금씩 설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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