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지베르니, 모네의 연못에서
내게 기한 없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기가 왔음을 알게 되었을 때, 여러 나라를 고민하다가 결국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끊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봄의 지베르니'였다. 파리에 처음 갔던 2017년 겨울에도 지베르니라는 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겨울이라 의미가 없었다. 꽃이 이렇게 만발하는 시기에, 새로 싹이 트는 시기에 지베르니가 어떨지 너무나 궁금했다.
클로드 모네. 아마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에 한 명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미술시간에 전시회를 다녀오라는 숙제를 하러 내 돈 주고 처음 간 전시회가 덕수궁 옆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한 모네 전이었다. 그때는 모네를 잘 알지도 못할 때였는데, 그럼에도 그 그림들이 마음에 남았다. 파스텔톤의 그 그림이 마음에 남았다. 처음엔 이게 왜 특별한가 싶었지만, 그 순간의 빛을 기억해 흐릿한 경계로 표현된 그 색감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그 물감들이 만드는 빛이 좋았다.
그 후로도 모네의 그림은 꾸준히 접했다. 작년 겨울에 도쿄 여행 갔을 때도 모네전을 보고 오기도 했고.
그렇게, 인생의 절반쯤을 좋아해 온 모네가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 그것도 수련 연작들을 제작했던 곳인 지베르니를 갈 수 있다니. 떨렸다.
'언제 가지?'
파리보다는 조금 더 북쪽에 있어 날씨가 더 오락가락한다는 곳이었다. 날씨를 보니 다음 주는 내내 비가 온다 하고, 도착한 첫 주에 가야 할 것 같았다. 구름 표시가 있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날씨 운을 믿고 진행해 보기로 했다. E-ticket으로 미리 예매를 했다. 티켓은 non-refundable이었으니, 이제는 그저 날씨가 좋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첫차를 타야 하나 고민했지만, 어차피 오픈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냥 10시쯤 도착할 수 있게, 오전 8시 기차를 타기로 했다. Saint-Lazare역으로 가서 Vernon-Giverny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시차적응이 덜 된 시기에 다녀오길 잘했다. 엄청 아침에 일어나서 다녀왔다.)
기차는 사실 Vernon역에 내려줬는데, 거기서 셔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여태 내가 카드로만 생활해서 간과한 것은 현금이었다.
아직도 그곳의 셔틀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중에 생각해 볼 때는 다른 버스가 하나 더 있었던 걸로 봐서 셔틀이 두 가지인 게 아닌가 싶다. 여튼, 내가 탄 셔틀은 우리가 말하는 코끼리열차같이 생긴 셔틀이었다. 그 기사님이 우리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호객행위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때는 그게 유일한 셔틀이라 생각했다.
그 기사님이 카드는 안되고 현금만 된다고 할 때 아차 싶었다. 카드만 있다고 하니, 저기 ATM에서 돈을 뽑으라며 안내를 해줬다. 다행히 나 말고도 비슷한 상황인 사람이 많았다. 다들 ATM에 줄을 서서 돈을 뽑는 동안 얼른 트래블로그로 돈을 환전해서 뽑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해 간 e-sim은 잘 될 때도 있었고 안될 때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거기서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았다. 겨우겨우 들어간 하나머니 어플 화면들은 또 어찌나 생경하던지. 자꾸 마지막 환전인 엔화만 뜨고 유로가 뜨지 않았다. 저 멀리 기사님의 시선이 느껴져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잠깐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마음이 급하니 더 안 되는 것 같았다. 이 셔틀을 놓치면 적어도 30분은 기다려야 할 거라, 발을 동동 구르고 기사님을 계속 보면서 폰을 재촉했다.
다행히, 해결이 되어 무사히 셔틀을 탔다. 셔틀을 타고 가는 길에 Vernon 버농, 이란 도시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설명들이 나왔다. 날씨가 조금 쌀쌀했지만, 이내 봄 풍경에 마음을 뺏겼다. 가는 길에 한아름 가득 피어있는 겹벚꽃을 보며 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지.
지베르니 주차장에 셔틀이 도착했다. 아, 근데 하늘을 보니 조금 거무죽죽했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어둡지 않았는데. 이쪽 지역은 날씨가 변화무쌍하게 바뀐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조금 시무룩해졌다. 사람이 조금이라도 적을 때 모네의 연못을 보고 싶어서 재빨리 그리로 갔지만, 흐린 날씨에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별로였어서 사진마저 다 삭제해 버렸다..)
그래도 날씨가 변화무쌍하다는 건, 다시 맑아질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일단 모네의 집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이쪽 날씨가 조금 더 나았다. 아닌가, 어쩌면 꽃 때문이었을까? 빼곡하게 심긴 벚나무들과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튤립들, 이제 막 봄을 맞이하고 있는 연둣빛 잎이 가득한 정원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모네의 집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정원을 볼 때면, 진짜 행복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곧이어서, 이 정원관리를 어떻게 다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대에 이미 인정받은 화가였던 모네는 부자였음이 틀림없겠다는 생각도.
집 안의 색감도 노랑, 파랑으로 예뻤다. 노란색 다이닝룸에서 바깥의 튤립들을 보며 식사한다니. 정말 낭만의 끝이 아니었을까? 이 계절, 모네가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럼에도 모네의 연작에서 아이리스와 몇몇의 꽃을 제외하고는 꽃이 많지 않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하다.
집에서 시간을 충분히 보낸 뒤, 다시 연못으로 왔다. 왜냐면, 날이 갰으니까!
해가 드니, 연못에도 파란 하늘과 연둣빛 나무들이, 꽃들의 반영이 나타났다. 모네 그림의 포인트는 물에 반영된 버드나무 잎들과 수련의 조화, 그 오묘한 경계들이니, 그 순간을 다양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처음의 흐린 풍경도 모네에겐 모두 귀한 풍경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빛이 있는 풍경이 좋아 너무 모르는 척해버린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 와서야 그런 생각이 든다. 흐린 정원의 사진을 지울 때는 아무 죄책감도 없었는데 말이다.
물에 반영된 민트색 혹은 청록색의 일본식 다리도 보고, 그 앞의 풀꽃들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일렁이는 물들의 잔상을 그렸을 모네를 그려보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일본식 다리에 아직 등나무 꽃이 피지 않았고, 연못에는 아직 수련이 없었다.
내가 한 때 그림을 그릴 때 자주 그리던 소재라 정말 보고 싶었던 풍경이었는데, 등나무 꽃과 수련이 없어 아쉬웠다. 수련은 여름이 되어야 만개하는 모양이었고, 등나무는 조금 더 따뜻한 봄에야 피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날이 지나 등나무가 필 때쯤 다시 지베르니에 와야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다시 가지 못했다. 지금도 그 부분은 조금 아쉽다.
지베르니에 가보니, 어떻게 이 풍경을 그림에 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싶다. 관광객인 나는 해가 어느 정도 떴을 때 다른 사람들이 가득한 풍경을 만났는데도 예뻤는데, 모네는 이른 새벽의 안개가 피었을 때부터 느지막한 오후 햇볕이 노랑으로 주황으로 물드는 시간까지 모두 만났을 텐데. 그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이 주는 색감들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천천히 지베르니를 둘러보고, 예쁜 날씨와 꽃을 보며 미소 짓는 사람들도 구경하며 여유롭게 지베르니를 나섰다. 맨 처음 내리면서 찍어둔 셔틀버스 시간을 보고, 시간에 맞추어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파리로 돌아가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모네 할아버지, 부럽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