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카멜레온들을 방생할 날을 기다리며
대학 시절, 매번 방학이 그저 흘러가버리지 않도록 해주시던 고마운 분이 계셨다. 2월의 어느 날은 그분의 생신이어서, 고민 끝에 몇 날 며칠에 걸쳐 적어 내려간 시 한 편을 편지지에 담아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과 술자리를 갖게 되었을 때 사실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시를 무지 싫어했다고 털어놓았고, 의도치 않게 큰 웃음을 안겨드릴 수 있었다. 유머감각이 부족한 내게 그런 일은 꽤 드문 일이다.
도도하게만 느껴지던 시가 '그대'가 되어 내 마음으로 '노 저어 온' 것은 고등학생 신분에서 탈피한 후에 다시 펼쳐 본 EBS 교재에서 대면한 몇 편의 시 덕분이었다. 노 젓기의 첫 주자는 오규원 시인의 '아이와 망초'였는데,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이 한 문장이 나를 완전히 홀려버렸다. 그 순간 환상적 날(生) 이미지가 어쨌다느니 하는 친절하고 장황한 해설은 무의미해졌다. 문장이 가슴에 남긴 파동만이 넘실거렸다. 곧 신동집의 '오렌지', 이상의 '거울',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 같은 시들이 뒤를 이어 나의 '그대'들이 되어주었다. 첫눈에 반한 시들을 온종일 읽고 되뇌고 곱씹다보면 조사 하나조차도 허투루 쓰인 것이 없어보여 경이롭기까지 했다. 호수에 잔잔한 파도가 이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내가 직접 시 비슷한 무언가를 끄적여본 건 그로부터 약 1년 정도가 흐른 시점이었다. 어느 날 동생이 학교에서 '아버지'라는 글감으로 시를 써서 입상을 했다고 했다. 평소에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동생과 진지하게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 내용이 무척 궁금했는데, 안타깝게도 시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동생에게 어떻게 썼느냐고 물어봐도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는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그 시가 어땠을지를 밤늦도록 상상하다가 문득 내 동생을 시에 담아보고 싶어졌다. 이면지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이리저리 써보고, 연결해보고, 바꾸어보고. 그날 새벽 말고도 몇 번의 새벽을 더 거친 후에야 짤막한 6줄로 남은 결과물이 그런대로 읽을 만해 보였다.
사춘(思春)
둥그런 지축 흔들던 발 덮어버릴 큰 손
굉음에 울먹이던 귀를 온 종일 틀어막다
또랑한 음성, 양 나귀 따위를 읽던
웅얼대는 독방 속에 묻어버린 채.
적막에 기척하는 초침의 찰나에 업혀
너머 문 밖 우직스레 더욱 고요할 밖에
이후에도 시로 써보고픈 무언가들은 이따금씩 나를 찾아와주었다. 다만 문제는, 이 손님들이 방문하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으며 다른 손님들이 기척할 때면 내가 철저히 문전박대해버렸다는 것이다. 줄글을 쓰는 일에는 인색해졌다. 가끔 최소한의 단어로 그림을 그려보려는 순간들에만 골머리를 앓을 뿐이었다. 함축과 여백의 미에 심취한 정도를 넘어 만취 상태였던 듯하다. 대학교 1학년 때 '창의적 글쓰기'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하고 나는 그런 다짐을 했었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내 모든 단상들을 꼭 글로 다듬어 남겨두리라! 그러나 그 다짐조차도 머릿속에서 흩어진 구름들 중 하나가 되어버린 건지. 나는 어느 샌가, 말하자면 게으른 편작(偏作)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를 쓰는 것은 많은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음미하고, 감정을 이미지로 그려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만의 정신세계를 둘러싸는 울타리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시'만' 쓰기 버릇한 결과였다. 시가 어느 샌가 새장을 닮은 구두 같아졌다고나 할까. 이 글이 그 구두를 다시 구름 위에 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 게으름을 고백하는 동안 어떤 연장선상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모르게 논어의 한 구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學而不思則罔이요, 思而不學則殆라.' 나는 부지런히 나를 쓰고 남을 읽으며 더 배워야 한다. 감히 시를 읊어대기엔 내 세계는 아직 너무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