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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부스터 켄 Jan 06. 2019

인하우스 vs 대행사,
어떤 시작이 더 유리하죠?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 속지 말자. 나머지 반은 나의 몫이다.

1.

1835년 9월 15일, 갈라파고스 제도에 거대한 배가 등장한다. 영국에서 출발한 이 배의 이름은 사냥개 비글에서 유래한 비글호. 훗날 인류에 큰 영향을 끼친 진화론의 창시자로 불리는 찰스 다윈이 이 배에 타고 있었다. 다윈은 이 곳에 약 5주 동안 머물면서 코끼리거북, 이구아나, 핀치새 등 다양한 생물을 연구하면서 같은 종이라도 지역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대표적인 예가 핀치새였다. 갈라파고스 제도 이곳저곳에서 채집한 새 여러 마리를 조류학자 존 굴드에게 보여줬는데, 놀랍게도 모두 핀치새였던 것이다.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약 14종의 핀치새가 살고 있었다. 이 새들은 기본적으로 닮았지만 부리는 서로 다른 모양이었다. 알고보니 살고 있는 환경과 먹이에 따라 부리의 모양이 달랐던 셈인데, 예를 들어 곤충을 먹는 핀치새의 부리는 나무 속 곤충을 꺼내 먹기 좋게 뾰족하고 가느다란 모양이었고, 딱딱한 씨를 먹는 핀치새의 부리는 씨앗을 쪼갤 수 있도록 크고 튼튼했다. 다윈은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던 핀치새들이, 살고 있는 해당 환경에 유리한 변이를 가진 채 교배를 되풀이하면 이런 현상이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명체가 환경에 맞춰 진화한다는 '자연선택설'은 1859년 그의 첫 번째 책, 『종의 기원』에 집약되었다.


다윈에서 시작된 진화론은 지금까지 전해지며 인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진화론이 맞냐 안맞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반대론자도 있기 때문에 잠시 뒤로 둔 채, '자연선택설'만 집중한다면 흥미로운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인간 또한 생명체이기에 어떤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맹자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 풍수지리를 따져서 명당을 확보하려는 행위, 집이 동쪽이나 남쪽을 봐야 좋다는 말. 모두 예전부터 환경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특히 아이의 성장환경은 어떤 성인이 되느냐를 좌우하기 때문에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하거나, 좋은 친구만 사귀라고 치열하게 종용하는 학부모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

사람에게 있어 환경의 중요성은 학창시절 뿐 아니라 직장도 마찬가지다. 어떤 직(職)이냐, 어떤 업(業)이냐에 따라 나의 커리어가 달라진다. 단순히 돈을 벌어 생계유지를 한다는 계산만으로는 직업선택의 중요성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 고등교육을 받아서 더 좋은 직장을 얻는 이유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고 실제로도 자기 직업에 대해 돈보다는 의미를 이야기 하는 방향을 선호한다. 일례로 면접 볼 때 '우리 회사에 왜 지원하셨습니까?'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돈 벌고 싶어서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구직인은 그리 많지 않다. 하루 1/3 이상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장은 돈을 버는 기능 이상으로 나의 감정, 지적수준, 경험, 인간관계 등 나의 현재와 미래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절대변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을 점으로 삼고 이 경험들을 주욱 이으면 하나의 커리어 패스(career path)가 형성되는데, 경력의 맥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맥락이 일관적일 수록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강력해져서 이직이 쉬워진다. 이 커리어 패스에서 중요한 지점은 시작점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특히 마케터는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 중에 하나고 요즘 들어 워낙 세분화 되다 보니 스타트를 잘 끊어야 된다는 강박이 꽤 많아진 것 같다. 마케터를 꿈꾸는, 혹은 주니어 마케터가 예전부터 굉장히 많이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하우스 vs 대행사,
어떤 시작이 더 유리하죠?


왜 이런 질문이 많이 들릴까? 더 유리(有利)하다는 건 말 그대로 이득을 더 보고 싶다는 의미다. 이왕 같은 시간을 보낸다면 나에게 더 유리한 선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겪어보지 못한 입장에서 인하우스 마케터와 대행사 마케터의 차이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고 차례로 모두 겪어보자니 시간이 아깝다. 혹시나 인하우스 마케터가 시작점으로써 별로면 어쩌지? 대행사 마케터로 시작하면 앞으로의 커리어가 괜찮을까? 인생은 두 번 살수 없고 게임처럼 '저장-불러오기' 기능이 없으니 당연한 의문이다.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나는 이 질문이 영양가가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노력은 배제한 채, 남보다 유리한 시작점을 점유하여 조금이라도 앞서 보겠다는 계산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답을 얻기 위한 행위가 질문이라면, 질문을 잘 할 수록 좋은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을 잘 한다는 말은 자주 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단 한번의 질문이라도 상대방에게서 원하는 답변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질문을 잘 한 것이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물어보면 되지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는 의문이 든다면 다음을 보자. 다음은 위의 질문과 비슷한 예시 질문이다.


노래 vs 댄스,
어떤 걸 익혀야 아이돌에 더 유리하죠?


학원 vs 과외,
어떤 수업을 들어야 수능에 더 유리하죠?


빨강 vs 파랑,
어떤 색깔이 더 트렌디하죠?

연세대 vs 고려대,
어떤 대학교가 취업에 더 유리하죠?


눈치챘는가? 이런 질문은 정답이 없다. 명확하게 어떤 답변을 얻고 싶은지가 나와있지 않으며 제일 중요한 '나'에 대한 정보가 빠졌기 때문이다. 유리함을 따지기 전에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의도적인 질문 없이는 좋은 답을 얻을 수 없다. 특히 이런 류의 질문은 대답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 답변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질문을 많이 해서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설문조사할 게 아니라면 좀 더 질문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인하우스 마케터와 대행사 마케터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3.

참고로 이 글에서 말하는 마케터란 전통적인 4P 개념에서 Promotion 분야, 다시 말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직무에 종사하는 관계자 전부를 일컫는다. 따라서 인하우스 마케터와 대행사 마케터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업무로 맞물려 있다. 보통 클라이언트 기업이 대행사에게 외주를 줄 때, 각 기업에서의 담당자가 각가 인하우스 마케터와 대행사 마케터이기 때문이다. 업무 하나가 발생한다면 같은 선상에 있는 셈이다. 다만 외주를 주는 담당자냐, 외주를 받는 담당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두 부류의 마케터는 산업, 기업 크기, 직무 세분화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지만 굳이 일반화한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대행사에서 근무하면 전문지식을 깊게 배울 수 있고 다양한 산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광고대행사 AE의 예를 들자면, AE는 캠페인 하나를 할 때도 시작부터 끝까지 관여한다. 처음 클라이언트의 OT를 받을 때부터 캠페인 완료보고까지 AE는 빠지지 않는다. AE는 그 과정 속에서 클라이언트 담당자(인하우스 마케터), 내부 제작팀, 외주처 등 캠페인에 관련된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면서 업무방향, 업무범위, 업무시간, 업무비용을 조율한다. 마지막 정산까지 AE가 챙긴다는 의미다. 재직하는 대행사의 규모가 작을 수록 AE 한 사람이 많은 일을 담당하게 된다.


대행사는 '업무를 대신하는 회사'다. 클라이언트의 업무를 대행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대행사 담당자는 실무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체득하게 된다. 대행사 AE였다가 인하우스 마케터로 간 사람들이 유리한 이유다. 외주를 주기 전에 이미 일이 어떻게 될 지 대략 파악이 되니까 방향, 범위, 시간, 비용 측면에서 업무를 예상하고 진행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대행사 출신이 일을 잘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인하우스 마케터로 근무하면 몸 담고 있는 산업과 브랜드, 사용자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실제로 기업에서 마케팅이 경영전략, 회계, 재무, 영업, 생산, 유통, 고객서비스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다. 마케팅은 기업에서 중요한 분야지만, 그렇다고 다른 분야가 저평가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산업과 기업 시스템에 대한 이해는 대행사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인사이트다.


깊게 파고든 지식은 다시 말해 지식에 갇힐 위험도 내포한다. 대행사 출신의 인하우스 마케터가 고생하는 이유가 지금까지 해왔던 업무배경, 프로세스가 완전히 달라진 부분에 대한 적응이 힘들어서이다. 대행사 출신은 일은 잘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던 일'을 잘 하는 것이지 새롭게 직면한 일까지 잘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인하우스 마케터로 재직하면 전문업무만 반복하는 대행사 마케터보다 새로운 업무를 받아들일 확률이 크고 이에 따른 대응은 어디 출신이냐 보다 성장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인성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행사 출신은 시킨 일은 잘 하지만 일 자체를 만드는 데는 서투르다'는 말도 있다. 이 부분은 시험으로 이해하면 쉽다. 시험을 친다면, 두 입장이 공존한다.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입장과 시험문제를 푸는 입장. 보통 시험문제를 푸는 학생은 외우고 이해하는 노력을 통해 문제를 잘 풀려고 한다. 대행사 마케터가 이 경우인데, 업무 자체가 과업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특화되어 있다.


반대로 인하우스 마케터는 대행사 마케터에게 문제를 내는 입장이다. 문제 내는 게 쉬울 수도 있지만 어려울 수도 있다. 문제에 따라 답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 역시 질문의 일종이다. 좋은 답을 얻고 싶으면 문제를 잘 내야 한다. 폭넓게 상황을 파악하고 기업이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전문 에이전시가 필요한지를 파악하는 게 인하우스 마케터의 역할이다. 더 나아가면 인하우스 마케터는 대행사에게 문제를 내는 시험문제 출제자이기도 하지만 경영진으로부터 문제해결을 지시받는 입장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인하우스 마케터나 대행사 마케터 둘 자 문제를 풀어야 하는 입장이고, 문제를 풀 때 어떤 역할을 하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4.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작은 종합광고대행사 AE 출신의 인하우스 마케터다. 따라서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 '인하우스vs대행사, 어떤 시작이 더 유리하죠?'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유리하다는 말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누군가는 돈, 누군가는 성향, 누군가는 역량, 누군가는 성취감, 누군가는 워라밸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무엇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커리어 패스의 시작점을 인하우스 마케터로 할지, 대행사 마케터로 할지 고민입니다.'라는 질문이 가장 명확한 표현이다.


나는 강한 ‘자기표현욕구’를 직무로 연결해서 적성을 찾은 케이스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표현의 욕구가 강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손 번쩍 들고 대답하고 싶어 안달인 학생을 본 적 있는가? 그게 나였다. 특히 역사책을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 한국사 이야기 양장본이나 조선왕조실록을 달달달 읽었을 정도였다. 역사 시간에는 선생님과 토론을 할 정도였다.


주변 친구들의 눈이 고울리가 없다. 심하게 왕따를 당할 뻔도 많았고 잘난척한다고 배척당한 적도 많았다. 선생님이 역사 쪽지시험을 본다고 해서 전날에 공부를 했는데,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시험 이야기가 없길래 '선생님 시험 왜 안 봐요?'라고 했다가 친구들한테 엄청 욕을 먹었다. 내 입장에서는 시험 본다고 해서 공부를 했는데 그게 헛수고가 되는게 싫었던 것이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게 아쉬웠던 것이다. 이 모든 게 초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학창시절은, 바꾸어 말하면 자기표현의 욕구는 충족시키면서 타인과 교류하는 방법을 찾는 여정이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기표현이란 단순히 수업시간에 손 들고 대답하는 것 외에 굉장히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성향을 고집하면 타인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그 사이의 타협점을 찾는 것도 중요했다. 내가 대학교에서 찾은 방법은 광고동아리였다.


광고대행사 AE 시절은 나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학교와 달리 회사는 나에게 지금까지 익혔던 소통과는 다른 방식을 요구했다. 처음에 회사는 나에게 마음껏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성과를 중요시하는 광고회사에서 내 능력을 과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내가 만든 기획서, 내가 낸 아이디어가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나에게는 회의실이 전쟁터였다. 내 아이디어, 내 의견이 선택받아야 하는 싸움터였다. 항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준비를 단단하게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우기기만 한다고 상대방이 설득될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료를 찾고 근거를 찾고 논리를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회의실 안에서 상대방의 감정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업무를 위해 무엇이 더 옳은지에만 집중했다. 상사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일은 잘 하지만 인성은 별로라는 평가를 받았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회의에서 어떤 역할인가? 그 당시 나의 결론은 파이터였다.


그때 내가 제일 싫어했던 말이 '우리 모두의 아이디어'라는 말이었다. 말만 그럴듯하게 해서 팀워크를 유지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들렸다. 모두가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속을 따 까보면 기여도가 큰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꼬를 튼 사람과 그 뒤에 수로를 만드는 사람들은 다 수고했지만 제일 중요한 역할은 물꼬를 최초에 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뾰쪽뾰족하고 날카로웠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 뾰족함이 주변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이 타인에게는 의도치 않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업무가 사람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나를 반성하자 주변의 평판이 좋아졌다. 더불어 나의 자기표현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었다. 타인의 수긍하는 경우가 많아지마 자연스럽게 만족감도 높아진 것이다. 논리가 아니더라도 상대방을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업무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물꼬를 튼 사람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뒤에 수로를 만드는 사람들 또한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록 아이디어와 기획이 더욱 탄탄해지는 희열을 맛본 이후, 나에게 회의실은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닌 실험실이었다. 나의 성향과 직무가 일치할 때 더 이상 워라밸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일 자체가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인하우스 마케터로 이직한 이유는 간단했다. 더 하고 싶은 게 없었다. 혹자는 건방지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말 더 이상 새로운 업무가 없었다. 빠르게 승진했고 팀장을 일찍 달았다. 다양한 산업군의 브랜드를 경험했고, 그 와중에 브랜딩, 광고, 행사, 이벤트 등 현존하는 커뮤니케이션 툴은 거의 다 경험했다. 다시 말해 광고대행사는 나에게 있어 더 이상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었다. 


지금은 훨씬 만족스럽다. 비록 몸담고 있는 산업은 하나여서 이전보다 다양성은 극도로 줄어들었지만, 대신 이 산업에서 브랜드를 일구기 위한 또 다른 다양함을 맛보고 있다. 상술했듯이 기업이라는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 마케팅이라는 톱니바퀴가 다른 유관부서와 어떻게 맞물려돌아가며 동력을 창출하는지를 경험하는 건 대행사에서 결코 겪지 못했던 소중한 자산이다. 대행사 시절에 배웠던 실무력을 발휘하여 업무 자체의 퀄리티를 높이고 대행사에게 좋은 문제를 출제할 수 있는 나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커리어 패스를 직선으로 만들어가는 지금까지의 노력이다.


직선의 정의는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다. 커리어 패스를 직선으로 긋고 싶다는 이야기는 헤매지 않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투자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은 당연하다. 다만 직선을 고민하려면 시작점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찍어야 하는 점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고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은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직선에 가까워질 수 있다. 


5.

선택에 대한 고민부터 하고 싶다면 나를 파악하고 기준을 세우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나는 자동차가 좋다고 하면 자동차 산업의 인하우스 마케터로 시작한다고 목표를 세우거나, 업종보다는 순수하게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직무 자체가 좋다고 하면 대행사 마케터로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본인이 뭘 원하는지 알면 자연스럽게 스타트를 어디서부터 끊을 것인지 계산이 나오지 않을까?


혹자는 인하우스 마케터를 목표로 하지만 직무지식을 선행학습하기 위해 대행사 마케터를 먼저 택하는 방법은 어떻냐고 한다. 모르는 지식은 익히면 된다. 대행사 업무가 좁고 깊으며, 인하우스가 넓고 얕은 셈인데, 인하우스 마케터부터 시작해서 모르는 지식은 그때마다 공부하면 그만이다. 이게 뭐 대단한 진리가 아니라 노력하면 다 익힐 수 있는 수준이다. 


많은 후배들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일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유리한지 고민하는 질문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본인이 뭘 원하는지부터 파악하고, 몸담은 곳에서 열심히 해서 최고가 될 생각부터 하라고 한다. 어차피 같은 업무의 맥락이기 때문에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쪽이나 푸는 쪽이나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진화하고 성장한다. 몇 만년을 다루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간이 진화하는 시간은 극히 짧겠지만 인간의 성장 역시 진화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핀치새의 서로 다른 부리만 봤겠지만, 다윈은 그 부리에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노력한 핀치새의 치열함을 발견했다. 씨앗을 먹었던 핀치새가 과일을, 곤충을, 선인장을 먹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세대를 거치며 노력했겠는가. 생존을 위한 절박한 핀치새의 심정을 다윈은 공감했고 진화론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문득 시작만 좋으면 다 괜찮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시작이 반이면 나머지 반도 잘 해내야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나의 몫이다. 대행사냐 인하우스냐를 계산적으로 따지는 건 내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한 뒤에 해도 무방하다. 부디 미래를 고민하는 모든 분들이 이 글을 보고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진화하여 생존에 성공한 핀치새처럼 멋지게 날아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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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부스터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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