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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Feb 03. 2024

무서운 글을 왜 써요?

'나는 왜 굳이 잔인하고 보기 싫을 수 있는 괴담 같은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걸까?'


아내는 기괴한 이야기를 쓰는 날 보며 간혹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내면에 연쇄살인마의 기운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러기엔 지극히 평범하다. 물론 오랜 시간에 걸쳐 호러와 공포 장르의 콘텐츠를 많이 보긴 했다.


* 공포와 호러의 차이 - 나무위키

일반적인 정의는 의도적으로 관객의 근원적인 공포를 건드려 부정적인 정서를 일으키는 영화. 좁게는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장르 영화를 말하지만, 보통 저 정의에 해당하는 모든 작품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넓은 의미로 쓰인다. 하단의 영화 목록도 광의에 근거한 것이다. 호러 영화라는 말로도 많이 쓰인다. 하지만 공포물과 호러물은 차이가 있는데, 공포를 유발하지 않고도 소름이 끼치게 할 수 있다면 그건 공포물이 아니라도 호러다.


"오빠는 대체 왜 그런 걸 써? 상상만 해도 무섭지 않아?"


쓰는 동안은 특별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그리고 몇 편 안 되는 이야기를 썼지만 지금 쓰는 내용은 사실 아버지 그리고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 동네의 모습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설마 [수와동]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부 사실인가요?"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다. 때로는 사실의 비중이 클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라는 사람의 시선과 생각으로 필터링된 순간 이미 허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실은 소설 보다 혹은 상상보다도 더 잔혹할 때가 있다. 그런 일을 현실에서 겪게 되는 순간 그 어떤 순간보다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살면서 매 순간 이런 일을 겪으며 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살던 달동네에 가깝던 그곳에는 지금의 시선으로는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 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하는 곳이었다. 사람이 나빠서라던가 환경이 이상해서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만 실제로 살아가다 보면 이상한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한때는 기도원에서 짧게나마 생활해 본 적이 있었다. 그곳도 내게는 새로운 경험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처음 기도원으로 들어갔을 때 그리고 집회의 현장 속에 내가 함께했을 때의 경험을 지금도 잊기 힘들다.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장면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고 어느 순간 그 생활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안수기도의 시간과 행위는 희열이 느껴진 적도 있었다. 어쩌면 개인은 집단 속에서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180도 변할 수 있겠구나라고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좀 더 행복한 결말을 기대할 순 없을까요?"


작가병에 걸려서 새드 엔딩이 마치 최고의 결말인 것처럼 소설을 쓰고 싶지 않다. 실제로 그럴 깜냥이 안되기도 하고. 다만 생각한 틀은 있는 편인데 특정 에피소드는 슬프게 마무리를 짓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에피소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슬픔 속에서도 느껴지는 행복이 있다는 걸 표현해 보고 싶다. 에피소드에 따라 정할 생각이지만 꼭 새드 엔딩만 쓰고 싶지는 않다.


"우울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쓰면 정신세계가 피폐해지지 않나요?"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러 반대 성향의 연애나 가벼운 소재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매일 우울하고 무서운 이야기만 생각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아무래도 밝은 에너지보다는 어두운 에너지가 생성되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래서 혼자 갖다 붙이자면 음양의 조화를 이루듯 에너지의 조화가 무엇보다 필요한 거 같다.




쓰면서도 혹은 쓰기 전에도 고민이 참 많이 된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적자라는 게 어느 순간 목표가 됐다.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할 거라면 행동으로 옮기기라도 해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다 보니 즐거운 점이 하나 생겼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이나 영상 등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리 만족 외에 스스로 창조하는 즐거움도 무시 못하게 됐다. 물론 좀 더 생각한 대로 혹은 느끼는 대로 표현이 잘 안 돼서 아쉬울 때가 많긴 하지만.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 이런 부분도 어느 정도는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별로 나오지 않는 조회수와 구독률이지만 브런치에 틈틈이 글을 써볼 생각이다. 이외에 별도로 다른 형태의 소설은 새로운 도전을 고민하고 있는데 아무튼 재능이 다소 부족한 점을 노력이라는 형태의 양으로 커버해 보고 싶다.


앞으로도 어떤 글을 쓰던 조금 더 재미있고 잘 읽힐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지속해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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