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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Feb 15. 2024

그는 나를 모른다 4

D-DAY. 솔직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숱한 게임을 해오면서 누군가를 직접 만나보는 건 처음이다. 유명한 게임 클랜에서는 정모가 주기적으로 열린다고도 하던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이었다. 애초에 인싸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부러 마이너 한 게임만 찾아 한 것도 그런 내 성향과 관련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갑자기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가 넷카마인 걸 알 텐데.. 그런데 날 만나려고 한다고?’


자신감이 급락했다. 괜히 만난다고 한 걸까. 지금이라도 약속을 취소해야 하나? 차라리 체리콕 님이 취소해 주면 좋겠다. 그래도 궁금했으니까 한 번은 만나야지.


머릿속에서는 치열하게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생각들로 정신이 없다. 그렇게 밤새 잠을 설치고 결국 아침이 찾아왔다. 밤을 새운 후유증으로 인해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렀을 땐 다크서클이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는 듯했다. 몰골을 보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어제 퇴근 후에 머리라도 정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냥 있는 걸 꺼내서 입고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너무 편한 잠옷 같은 느낌의 옷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출근할 때 입는 정장을 입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럴 때 캐릭터처럼 갑옷을 입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현실과 게임은 엄연히 다른 법. 현실에 어울리는 갑옷을 구매해야 한다. 


조금 일찍 홍대로 나가 있으려고 생각했는데 잠을 너무 못 자서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해서 몇 시간만 알람을 맞춰놓고 자야겠다. 이대로는 만나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정신이 없을 테니.


‘딱.. 3시간만 자자. 그러면 11시니까. 점심 먹고 나가면 될 거 같아.’


알람을 5개 정도 세팅하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파 묻었다.



“뭐 하는 거야 이 변태놈아!”

“네?”


영문도 모른 채 뺨을 맞았다. 


‘아니 누군데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거지?’


“야! 너 뭐야?”


근데 얼굴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목소리로 봐서는 분명 여잔데. 자세히 살펴보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다시 한번 뺨을 노리고 손이 날아온다. 생각보다 느리게 날아오는 손동작을 확인하며 피하자 이번에는 몸에 지니고 있던 칼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꺼내진 칼을 내게 휘두르며 소리를 지른다. 


‘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


마지막에 휘두르는 칼이 어깨를 내리치려 한다.


“으아아!”


나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번쩍 눈을 떴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순간 뇌정지가 와서 아무것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잠시 후 몽롱해졌던 정신이 돌아오며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황급히 집어 들었다. 3시 30분. 두 눈을 손으로 비비고 다시 한번 휴대폰을 봤다. 3시 31분. 망했다. 말도 안 돼. 결국 늦잠을 자버렸다.


‘XX. 어떡하지.. 홍대까지 40분 걸리는데..’


지금 바로 씻고 나가야 한다. 일찍 나가서 옷을 좀 사려고 했는데. 계획이 물거품이 돼버렸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일단 샤워부터 하고 있는 옷 중에 제일 멀끔해 보이는 걸로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5분도 안 걸려 후다닥 샤워를 끝마치고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황급히 뛰어다녔다. 옷장을 열어 최대한 멀끔한 옷을 찾아 뒤적거렸지만 도저히 입고 나갈만한 옷은 없었다.


‘최악이네. 정장만큼은 입고 싶지 않았는데..’


방법이 없다.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멀쩡한 게 정장 밖에는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정장을 꺼내 입었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맞선을 보러 나가는 아저씨 같이 느껴진다. 이상하게 정장만 입으면 평소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그래도 약속에 안 나가거나 늦을 수는 없지. 설령 잘 안되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뭐 게임 속에서만 알고 지내던 사람일 뿐인데.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얼굴은 풀이 죽어 있었다.


버스는 막힐 거라는 생각이 들어 지하철을 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빨리 도착했다는 거다. 겨우 늦지는 않았구나. 일찍 와서 이것저것 하려던 계획이 보기 좋게 틀어져서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하철 출구를 올라가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더 사람이 많은 거 같다. 역시 홍대는 홍대구나.


평소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누군가를 잘 만나지는 않는 편인데 그나마 접근성을 고려해 홍대로 정한 거였다. 


‘얼마만이지 홍대가?’


얼핏 생각해 봐도 최소 1년은 넘은 거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다 오를 무렵 약속했던 KFC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5시 5분 전. 이 정도면 솔직히 일찍 온 것도 아니다. 연락처를 받고 나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연락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잠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번호를 눌렀다.


“[대략 경쾌한 벨소리]”


‘어?’


전화를 걸었는데 바로 옆에서 벨소리가 울려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옆을 돌아봤을 때 체리콕 님. 아니 그녀가 생긋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너무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멀쩡하게 아니 멀쩡하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이쁘게 생긴 여자가 서 있었다.


“저.. 혹시 비앙카 님?”


처음으로 아이디를 비앙카라고 지은 걸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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