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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Mar 10. 2024

그는 나를 모른다 11

그렇게 그녀와 난 합법적인 동거(?)가 시작되었다. 물론 저녁이나 일이 있을 때는 당연히 각자의 시간을 가졌고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환자와 간병인 사이였을 뿐이다. 그래도 제법 우린 많이 친해졌다. 체리콕 아니 보라 누나는 생각보다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이다. 그녀도 나처럼 이름에 색이 들어갈 줄은 몰랐는데 그날 병원에서 내 이름을 듣고 웃은 이유기도 했다. 처음 누나의 이름을 알게 되고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푸름아. 절로 가자! 리젠될 시간이야 어서 와!”

“알았어 누나. 잠깐만 이거 좀만 노가다 하고.”


사실 병간호는 금세 핑계로 변했다. 마침 누나가 지내는 곳에서는 낮에도 주변이 시끄러웠던 편이라 업무 집중도가 잘 나지 않았었고 그래서 카페나 공유 오피스를 이용했었다고 하는데. 마침 내가 자취하는 집은 조용하기도 하고 둘이서 지내도 크게 나쁘진 않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친해졌냐고?


글쎄..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남녀 사이라는 게 참 이상해. 거리감이 분명 있었음에도 우린 티링이라는 공유할 수 있는 게임이 존재했고 그 안에서 쌓아왔던 내적친밀감이 생각 이상으로 컸던 거 같아. 뒤늦게 알았지만 사실 누나도 날 처음 본 날 약간의 호감이 생겼었다더라고. 풉. 아 미안. 자랑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사실 약간은 자랑을..


솔직히 처음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어. 게임하다가 만난 사람과 연인으로 발전한다? 삼류 소설에서도 이제 잘 쓰지 않을 법한 내용이지. 그런데 그게 되더라고? 정말이라니까?


내 외모가 엄청 못 생긴 건 아니야. 그렇다고 연예인처럼 보이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어쩌면 내겐 과분할 정도로 빛이 나는 그녀지. 내가 다치던 날 어쩌면 운명처럼 인연이 닿은 건 아닐까 싶어서 신께 감사한 마음도 들어. 신이 정말 있다면 말이지.


“푸름! 안 오고 뭐 해!! 지금 튀어나왔잖아. 혼자 잡다가 죽겠어 빨리 와!”

“알았어 지금 가요 가!!”


잠시만 전투 좀 하고. 그녀는 여전히 티링을 유지보수 중이야. 다행히 아직까진 섭종을 하기 않기로 했다고 해. 물론 회사가 적자를 누적하면서까지 계속해서 끌고 가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한시름 놨지. 그녀와 나를 이어준 티링. 게다가 그녀에겐 특별한 애착이 있는 게임이기도 하니까.


“엇! 어.. 나 안 움직여. 왜 이러지?”

“푸핫!! 야 너 뻗었어!!”

“아씨.. 왜 나만 렉 걸려?”

“컴퓨터 좀 바꾸라고 했잖아. 쯧쯧. 경험치 잔뜩 깎여서 어떡하니.”

“으아아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전투를 끝마친 누나의 품에 안겼다. 좋은 향기가 난다. 뭐야 지금 당신 나한테 욕하고 있어 설마? 그래도 어쩌겠어. 난 이제 더 이상 솔로가 아니라고. 놀리려는 게 아니야. 사랑을 시작하니까 너무 좋아서 그래.


내게 우연처럼 다가온 누나와 난 앞으로도 지금처럼 게임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와 미래를 알차게 보낼 생각이야. 더 이상 회사와 집만 오가며 우울함에 빠져 살 필요도 없어. 숨겨야만 했던 내 본모습을 들켰지만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나니 이젠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네.


처음에 그는 분명히 나를 몰랐어. 나 또한 그녀를 몰랐었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더라고. 결국 그녀와 난 어느 대화에서는 서로에게 마음이 닿았던 건 아닐까? 그리고 용기 내길 잘했다고 생각해. 그날 어떻게든 만남을 피했으면 지금 우리는 함께 있지 못했을 테니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기처럼 안기는 거야?”

“잠시만.. 너무 좋아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으.. 닭살 돋아. 나도 고마워.”


가벼운 입맞춤. 꿈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자신이 없더라도 너무 혼자만의 세상으로 숨기만 하진 마. 조금만 용기를 내. 나도 이렇게 내 짝을 만날 수 있을지 몰랐어. 어딘가에 분명 당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가 있을 거야. 물론 당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는 되어 있어야겠지.


“푸름아.. 배 안 고파? 나 배고픈데.”

“으응. 조금 더 이렇게 있고 싶었는데. 뭐 먹을까?”

“그래. 우리 장 봐서 파스타 해 먹을래?”

“그래 산책도 할 겸 나가자.”

“나 준비 좀!!”


화장실로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배실배실 웃고 있는 내 모습. 행복해. 이 시간이 계속 허락되길.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번 주말에는 공원 놀러 가자고 해볼까? 아니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홍대?


“준비 끝!”

“와아..”


내 앞에 눈부시게 이뻤던 첫날의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환하게 웃는 날 보고 그녀도 환하게 웃는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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