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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Apr 20. 2024

그냥 써 보는 이야기 5

"어렵네."

"또 뭐가?"

"평범하게 사는 거."

"또 시작이네.. 병이야 병 이 정도면."


술만 취하면 지겹게 반복하는 이야기. 하지만 언제나처럼 투덜거리면서도 신세한탄하는 얘기를 들어주는 내 친구 희민이.


"그거 기억나? 우리 고등학교 때 야자 째고 노래방 갔던 거?"

"한두 번이냐? 재밌긴 했지. 갑자기 왜? 노래방이라도 가자고?"

"됐어. 이제 옛날처럼 1시간씩 풀로는 절대 못해. 체력도 안되고 목도 너무 아파. 좋아하던 노래는 이제 한참 뒤져야지만 찾을 수 있게 됐어."

"아저씨가 별 수 있냐."

"아이씨 거참. 결혼 안 했는데 왜 아저씨야!!"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거 보니 개저씨인 듯."

"응 반사."

"야.. 하나도 안 어려 보여. 그냥 하던 대로 해."


다시 또 얼마나 마신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소주가 5병 정도 널브러져 있었다. 언제 시킨 찌개인지 물을 하도 부어서 이제는 소금의 짠맛 정도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야.. 나 희정이 지인짜 사랑했다? 알지 너도? 내가 걔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아 징한 새끼.. 또희정이야? 아.. 왜? 그냥 다른 여자 만나라니까?"

"안돼. 안돼. 내가 걔한테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만나? 말도 안 돼. 누구 신세 조지려고."

"병X.. 지나간 일 가지고 더럽게 울궈먹네."

"뭐?! 야. 다시 말해봐."

"하씨! 그만해. 야 집이나 가자. 시간도 늦었어."

"뭐어으어야?"

"혀도 꼬였잖아. 가자고. 아 이 새끼 취한 척하면서 계산 안 하려는 거 같은데 하.."


희정이. 보고 싶다. 함께 10대부터 20대를 보냈었는데. 널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술만 마시면 여전히 이렇게 보고 싶은데. 연락을 못하겠어.


"가자. 택시는 탈 수 있지?"

"어디이이를가아아?더마셔어어.가지마아아아앗."

"꺼져. 내일 출근해야 돼. 야. 먼저 간다. 알아서 가."


'저 매정한 시끼. 가냐? 진짜 가냐고오?'


무심하게 떠나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취기가 올라와 뒤집힐 거 같이 토악질이 올라온다. 황급히 사람이 없는 공간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다 발견한 전봇대.


우웨에에에엑-


후욱- 후우..


우웨에에에에엑-


끄윽- 끅-


우웨에에엑-


"아 씨X! 죽겠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연거푸 토를 하고 나니 위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경련이 느껴져 쓰리다. 더 이상 토해낼 것도 없을 정도로 게워냈는데도 자꾸 토가 나오려 한다.


"야!! 뒤질래?"

"뭐어야아?"


가누기 힘든 몸을 애써 일으켜 험한 소리를 내뱉는 이를 쳐다봤다. 딱 봐도 욕을 입에 달고 살게 생긴 외모. 노랗게 염색한 머리. 취한 와중에도 순식간에 상대방을 스캔했다.


'이거.. 시비라도 붙어서 싸움으로 번지면 100% 내가 진다.'


"야? 취했으면 곱게 집이나 가. 신발에 튀었잖아!! 어떡할 거야 이거? 비싼 신발인데 아이씨.."

"죄송합니다."

"하나. 방금 전까지 한대 칠 기세로 쳐다보더니 존댓말 하네?"

"오빠. 뭐 해? 그냥 가. 취객이잖아."

"아니 봐봐. 새 신발에 이게 뭐냐고오."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차에 슬쩍 눈에 들어온 그녀.


'희정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느꼈다. 분명 희정이가 흠칫한 걸 봤다.


"오빠!! 그냥 가자. 취객이잖아. 뭐 싸우기라도 하려고?"

"세탁비는 받아야지."

"아 좀 그냥 가자고! 나 힘들어."


여자의 강한 어투에 남자는 다소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래도 신발이 자꾸 신경 쓰이는지 나와 여자친구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야! 너 운 좋은 줄 알아. 집에나 쳐 들어가. 아오 진짜."


돌아서는 남자의 모습. 그리고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그녀의 눈. 술과 찌개 냄새에 찌들은 난 그저 거짓말 같은 상황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토록 한 번만 다시 만나봤으면 했던 그녀가 눈앞에 있는데도.

하필이면 이 꼬라지로 밖에 못 만나다니.


어느샌가 둘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그래.. 다 떠나버려라. 야! 나도 새 출발 한다 진짜!'


하지만 돌아서서 집에 가는 내내 쓴맛만 강하게 느껴졌다. 취하게 만들었던 술까지 다 토해낸 건지 정신도 멀쩡해져 버렸다. 다들 갈 곳이 있어 보이는 이 거리에서 나만 방향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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