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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Apr 27. 2024

그냥 써 보는 이야기 6

이번 회사 워크숍은 생각해 보면 하기 싫은 일 투성이었다.


"이번 워크숍은 제주도로 갑니다!!"

"와아!! 좋아요 좋아요!"

"조를 짤 건데 꼭 지정된 올레길을 다 같이 걸어서 임무 수행도 해야 합니다~"


'뭐어? 올레길 투어??'


주말에 워크숍 가는 것부터 불만이었는데 실내도 아니고 바깥에 나가 몇 시간을 걸어야 하다니. 끔찍함 그 자체다.




같은 조에 속한 동생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워크숍 내내 싱글벙글 웃고 있다. 사실 그리 친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밤에 모이는 것도 귀찮았다.


"형!! 따라와. 오늘은 잘 생각마!"

"어디 가게?"

"아 따라와 봐. 좋은 일 있을 거야."


마지못해 따라간 곳에는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모여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와아! 이런 데서 다 보고. 어서 와요. 같이 놀아."

"하하. 네에."

"꺄악! 부어라!"

"마셔랏!"

"랜덤게임~ 랜덤게임!"


그래도 일단 초대해 줬으니 졸린 눈을 비비며 구석에서 홀짝홀짝 음료수를 마셨다.


"뭐야아! 재미없게. 빨리왓!"

"어.. 어?"


정말 놀기 싫었지만 또 막상 어울리다 보니 재밌기도 했다. 술도 몇 잔 마시니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그때 일면식은 있지만 딱히 대화는 안 나눠본 인사팀 소속 여직원이 옆에 다가왔다.


"평소에 보니까 되게 조용해 보이던데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순간 긴장이 많이 돼서 약간 떨렸다.


"하하? 그러게요. 딱히 접점이 없어서겠죠."

"술.. 안 좋아하죠?"

"네. 그냥 조금 마시는 정도예요."

"저도요. 우리 바람 좀 쐴까요? 제주도 와서 그냥 술만 마시다 끝나는 것도 아쉬운데. 게다가 우리 같은 조잖아요."


'그녀와 같은 조였구나. 크게 관심이 없어서 찾아보진 않았는데. 근데 갑자기 바람 쐬자고? 무슨 신호?'


마음속에 한 자락 의심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회사 내에서도 나름 인기는 있는 편이었는데 같은 부서 내의 동료들도 몇 번 만나보려고 시도하다 거절당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네. 좋아요."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단 둘이 바깥으로 나왔다.


"어이! 현정 씨! 어디가? 술 안 마셔?"

"하핫. 과장님 나중에요. 저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그래? 잘됐다 같이 갈까?"

"아니에요. 저 원준 씨랑 할 얘기가 있어요."


'엇?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다니..'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언급해서 괜히 얼굴이 시뻘게졌다.


"뭐야 남자친구야? 둘이 사귀는 거야?!"

"무슨 소리하세요~ 내일 올레길 걷는 것 때문에 얘기 좀 나눌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럼 갈게요."


현정 씨와 과장의 큰 대화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돼서 죽는 줄 알았다. 새빨개진 얼굴은 달아오를 듯 뜨거워져서 숨을 내쉬면 뜨거운 김이 후욱하고 내뿜어졌다. 아마도 알코올과 결합돼서 더 그런 거겠지.


"휴~ 살 거 같다. 나오길 잘했죠?"

"하아. 그러게요. 안 추워요? 겉 옷이라도 챙겨 오시지."

"괜찮아요. 저 쪽으로 좀 걸을까요?"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둘이 걸으니까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과 살짝 취한 취기의 콜라보인 듯도 하고 말이지. 그래도 기분이 꽤 좋았다. 이렇게 단 둘이 대화 나눌 일은 정말로 회사에선 없었으니까.


"여자친구.. 있어요?"

"네?!"

"뭐.. 못 물어볼 얘기도 아닌데 풋. 떨려요?"

"아.. 아니.. 갑자기 물어보셔서.."

"전 있어요."

"에??"


'뭐야 이 여자..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


"근데 헤어질 거 같아요."

"음.. 그렇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얘기를 왜 저한테.."

"헤어지고 나면 새로 남자친구를 만들어볼까 하는데. 그때 밥이나 한번 먹을래요?"


잠깐 바람 쐬자고 해서 엉겁결에 나오긴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취한 거 아니죠?"

"네. 하나도 안 취했는데요? 하하. 나. 원준 씨 꽤 오랫동안 지켜봤거든요."

"저를요오?"

"네. 용호한테도 오늘 원준 씨 꼭 불러달라고 했어요."

"용호한테요?"


'그러고 보니.. 좋은 일 있을거라던게 설마?'


"얘기 많이 전해 들었어요. 용호랑 밥 먹으면서 가끔씩 물어봤거든요. 어떤 사람인지. 내가 생각하는 이상형에 부합하는 딱 맞는 사람이던데요?"


'기분이 좋긴 한데.. 꿈이라면 여기까지!! 아니라면 잔인하잖아.'


"뭐.. 당장 뭘 어떻게 해보자고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사실 제가 다음 달이면 회사 그만두거든요."

"퇴사하시는구나."

"네.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워크숍. 우연을 가장한 만남. 대화. 후회하기 싫었거든요. 저도 이러는 거 첨이에요."

"고마워요. 저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인 거 같아서 계속 방어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전 아직 현정 씨에 대해 잘 몰라요."

"내일. 올레길 걸을 때 같이 걸어요. 내 옆에 딱 붙어서."


'딱 붙어서.. 딱 붙어서라고 했다.'


"네에~"

"그럼 이만 내일을 위해서 자러 갈까요? 먼저 갈게요. 그럼 내일 봐요."


그녀는 갈 때도 쿨하게 먼저 들어가 버렸다. 혼자 멍하니 남겨진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여차하면 아프다는 핑계로 올레길 걷기를 포기할까 싶기도 했는데. 얼결에 약속까지 잡아버렸으니.


"잠이나 자자. 하아아암."




어제와 달리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도 제법 쌀쌀하다. 제주도 날씨의 변화무쌍함을 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잘 잤어요?"

"안녕하세요 현정 씨. 네네 잘 잤죠. 컨디션 어때요?"

"머리가 조금 아프긴 한데 걷다 보면 나아지겠죠. 헤헤. 어제 약속한 거 안 까먹었죠?"

"네!"


우리는 그렇게 데이트하듯 둘이 딱 붙어서 한참 동안 올레길을 걸었다. 가끔은 길이 아닌 것처럼 보여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기도 했는데 여기저기 찾다 보면 올레길 표식이 나타나서 그대로 따라 걸었다. 구불구불한 해안 돌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도로로 연결되며 끊어진 길 건너편 방향을 찾아 겨우겨우 찾았다.


"헉- 헉-"

"숨차죠?"

"네에- 헉- 안 힘들어요?"

"조금 숨차긴 한데 비가 오니까 오히려 좋은데요?"

"현정 씨 운동 좋아하나 봐요. 전 글렀어요. 헉- 헉-"

"자! 잡아요."


그녀가 내게 손을 뻗어왔다.


"네?"

"잡아줄게요."

"아.. 그 그래도.."

"사심 아니고 그냥 도와주는 거예요. 무슨 상상하는 거예요?"


빙그레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와 비바람에 헝클어진 머리가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거 같았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 이렇게 내어주는 손을 덥석 잡아도 되는 걸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슬쩍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영~차~ 어때요? 좀 더 편하게 올라왔죠?"

"고마워요."


이번 워크숍은 생각해 보면 좋은 일 투성이다. 좋은 사람도 알게 되고 하기 싫었던 것도 함께 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문득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씩씩하게 올레길을 걷는 그녀를 따라 이 길의 끝까지 함께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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