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안녕하세요 스캇.”
“하하. 어서 와요 제프.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는데 잘 부탁할게요.”
“신기하네요. 제가 더 잘 부탁드려요.”
환하게 맞이해 주는 스캇 덕분에 쌓였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앞으로 알아야 될 게 많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다 보면 다 적응될 테니. 그리고 제가 매뉴얼을 급하게 좀 만들어 놨는데 시간 될 때 한번 보세요.”
스캇은 여전히 꼼꼼하고 체계적이었다. 회사 다닐 때도 항상 문서화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변하지 않았구나.’
오히려 그대로인 거 같아 다행스러운 기분이다. 급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분명 굉장히 세세하게 작성했을 것이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스캇이 만들었으면 믿고 볼 수 있죠.”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혹시나 새로운 사람이 함께 일하게 될 때가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었거든요. 보다가 좀 이상한 부분 있으면 답글 달아주세요. 접속 주소는 제가 슬랙으로 보내줄게요.”
“네? 슬랙도 사용해요?”
“아.. 습관이 참 무섭더라고요.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제가 관리하기 좋은 모습으로 운영하고 싶었거든요. 자료 공유도 편하고 하하. 계정 가지고 있으시죠? 이메일 알려주면 초대드릴게요.”
회사에서 쓰던 업무용 메신저 슬랙을 이렇게 또 만나게 될 줄이야. 회사가 아닌 바깥에서 사용하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그 외에도 일정 관리를 위한 구글 캘린더, 노션, 구글 드라이브 등 생각보다 많은 서비스 툴을 사용해야 했다. 어떤 일을 할지 몰라 걱정이 많았는데 익숙한 서비스를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제프는 이미 다 써본 것들이라 굳이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돼서 좋네요. 사실 제가 좀 욕심이 많아서 하하. 홈페이지도 직접 다 만들어 놨어요. 짬날 때마다 아직 코딩을 하긴 하거든요.”
“스캇 뭐예요.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뿐이지 여전히 개발도 하고 있네요. 대단해요.”
“그냥 취미 생활이죠 뭐.”
슬쩍 접속해서 이것저것 둘러보니 예상보다도 더 세세하게 매뉴얼이 작성돼 있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첫날인데 우리 커피나 한잔 마실까요? 오늘 오전은 특별한 일이 없네요.”
“좋아요.”
근처 카페로 갈 줄 알았는데 스캇은 주차장으로 날 데려갔다.
“어? 어디 가게요?”
“그냥 겸사겸사 교외로 가보면 어떨까 해서요. 사실 제가 하려고 하는 신사업이 F&B 관련업이기도 해서 요즘 좋다고 하는데 둘러보고 있거든요. 제프도 제 생각 들어보고 조언도 좀 해주고요. 그리고 나간 김에 식사도 해요 환영회 겸.”
‘F&B 사업이라니. 빵집을 차리려는 건가?’
알지는 못하지만 스캇은 역시 노는 물이 다르다. 나와는 다른 추진력과 재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그런 그의 당당함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제프 괜찮아요?”
“아? 아 잠시 멍을..”
“제가 첫날부터 너무 휘몰아치고 있죠? 제 멋대로 굴었네요 이것 참. 혼자 너무 신나서 그만.”
“아니에요. 환영회까지 해주니 좋죠.”
“그럼 갈까요?”
“네.”
스캇의 차는 고급 SUV였다. 그의 모든 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
차를 타고 40분 정도 걸려서 도착한 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규모의 대형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층수는 대략 3층 정도로 보이는 데 높이보다 규모가 압도적으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우와.. 여기가 카페예요?”
“하하. 저도 처음 봤을 때 놀랐어요. 이렇게 넓은 부지를 통으로 카페로 만들었다는 게 지금 봐도 대단한 거 같아요.”
규모도 규모지만 더 충격을 받은 건 평일 오전 시간인데도 주차장에 제법 차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에 늘 회사에만 있다 보니 평일 낮에는 다른 사람도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몸이 아프거나 특별한 일이 생길 때만 연차를 사용했다. 일이 끝나고 미뤄왔던 치료나 개인일을 해결하려 해도 마감시간이 임박해 제대로 처리하기 힘들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주말에 몰아서 해결하려 해도 영업을 하지 않거나 밀린 사람들로 인해 기다리는 시간이 한참 걸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불만이 생겼다. 일하는 직장인들을 배려하지 않는 업주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직장인을 상대로 돈을 벌지 않는데 어떻게 운영을 하려는 거야?’
풀리지 않는 의구심이었다. 오히려 그런 업주들이 배가 불렀구나 싶었달까? 그런데 오늘 초대형 카페에 와 보니 알 거 같다. 세상엔 직장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내가 모르는 세상과 사람. 돈을 버는 방법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하고 돈을 받는 고용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세상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랍죠? 이 시간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그러게요. 예전 같으면 다들 일 안 하고 놀러 다닌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지금은 아니에요?”
스캇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본다.
“어떻게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이 직장인들 위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최근에 느꼈어요. 처음엔 많이 이상했어요. 다들 일은 안 하고 대체 돈을 어떻게 버는 거지라고. 그러다 포기했죠. 그냥 부모 잘 만나거나 해서 인생 편하게 사는 팔자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으니까요.”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죠?”
스캇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비쳤다.
“네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회사를 나오고 나니 그동안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쓰이던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제가 현재 구매대행 형태의 몰을 운영 중인데 별거 아닌 중개지만 그걸 하면서도 생각이 바뀌었어요.”
스캇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서 좀 더 얘기를 풀었다. 최근에 헬스장 기구를 팔며 고객 응대를 했던 일과 과정에 대해서 얘기했다. 고객에게 최대한 친절히 응대했더니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개를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판매가 이뤄졌던 일. 물론 마지막은 합의로 끝이 났지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제프도 많은 일을 겪었네요. 근데 정말 중요한 얘기였어요.”
“중요한 얘기요?”
“네 사실 전 고객에게 과할 정도로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특히 제가 하는 고시텔 운영이 그래요. 입소문이라고 하죠? 한 명을 만족시키면 다시 또 어딘가에 소개하거든요. 꼭 그렇지 않더라도 분명 어떤 형태로든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리더라고요. 제가 고시텔을 확장할 수 있게 됐던 건 단순히 돈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핵심은 투숙하는 고객에게 가성비 높게 만족도를 주는 행동이 다였어요.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면 결국 그 이득이 저한테 돌아오는 구조더라고요. 저도 아직 사업을 길게 하진 않았지만 그냥 제 신념이랄까요. 하핫.”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일이라..’
다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스캇의 마음이 꽤 이해됐다.
“제프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에요. 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네요. 앞으로도 그렇게만 일해주세요. 전 그거 외에는 바라는 게 없어요. 혹시 저한테 원하는 거 있어요?”
잠깐 고민했던 문제가 떠올라 고민하다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제가 고민 중인 게 있는데.. 스캇이 부동산을 잘 알잖아요? 얘기할까 말까 망설여져서..”
“괜찮아요. 어떤 건데요?”
말하지 말라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입에 떠 먹여주길 바란다는 식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 알아본 것들이 조금 있어 아내의 퇴직금으로 벌여볼 수 있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스캇에게 물어봤다.
“음.. 제가 오늘 좀 생각해 보고 내일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네. 부담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부담스럽지 않아요. 일단 무인점포 창업은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게 어때요? 제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말이 무인이지 생각보다 메여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가요?”
“네 무인이라는 말이 매력적이지만 그것도 해보면 꼭 그렇지 않거든요. 잘 포장된 용어에 혹해서 일 벌이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충분히 경험을 해보고 나서 판단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 돈 들어가는 일인데 꼼꼼한 게 좋잖아요.”
“그러게요. 돈도 수고도 제가 하는 건데 너무 긍정 회로만 돌렸네요.”
“근데 사실 저도 말만 이렇지 잘 몰라요. 솔직히 그렇잖아요. 어떤 일이든 잘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남고 돈도 잘 번다는 거. 그냥 제 개인 생각이니까 그래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아까 얘기 나눴던 부동산과 관련해서는 저도 좀 알아볼게요.”
“고마워요 스캇. 바쁠 텐데..”
“하하. 한 식구잖아요. 제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요. 그러고 보니 저도 이런 말을 다 하네요. 가족 같은 회사가 사실 최악인 건데. 그렇지만 제가 경영을 구시대적으로 하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스캇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대형 카페에서 느낀 점은 일단 이렇게 큰 매장의 운영비가 얼마나 나갈까였다. 사람이 제법 있기는 했지만 이것만 가지고 이 큰 매장에서 수익이 날까 싶었으니까.
“참 신기하죠? 이렇게 넓은 매장은 뭘로 돈을 버는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스캇이 얘기를 꺼내 살짝 놀랐다.
“제가 이렇게 카페나 빵집을 돌아다니는 이유가 있어요. 처음에 납득이 되질 않았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사업구조와는 뭔가 접근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얼마 안 되는 커피랑 빵 팔아서 대체 뭘 남기려는 걸까 싶기도 하고.”
그때 낯선 사람 한 명이 다가와서 스캇에게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이에요 양대표님.”
“하하 잘 지내셨죠? 심대표님.”
“옆에는 누구?”
“아.. 오늘부터 제 일을 도와줄 귀인이에요. 예전 회사 동료기도 하고요.”
“안녕하세요. 김선호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소개자리가 어색했지만 인사를 건넸다.
“양대표님이 여기까지 데려올 분이라면 대단한 분이시겠네요.”
“그럼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다른 종류의 사람. 나 같은 사람이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싶은 열등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스캇은 안심하라는 듯 눈으로 신호를 보낸다. 마지못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요?”
“쓸데없는 일만 많아져서 정신이 좀 없었어요. 은행도 좀 많이 다녀야 했고. 요즘 경기가 좀 그렇잖아요. 사업하는 사람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쯧. 그렇긴 하죠. 어떻게 일은 잘 해결하셨어요?”
“겨우 대출 가능한 곳이랑 선이 닿았는데 이제 사업계획서 좀 다듬어야죠. 심대표님이 나중에 검토 한번 해주세요.”
“워낙 잘하시는 분인데 제 의견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래도 한번 볼게요. 그나저나 필드 한번 가야죠?”
“가야죠. 일단 벌이는 일만 조금 시작해 놓고요. 그때 얘기하셨던 지인 분은 카페 파실 생각 여전히 있으신가요?”
“네 아마도요. 그 친구 상황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어요. 처분 외에는.”
앞에 있는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둘의 대화가 이어진다.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하지만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