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다.

105 걸음

by 고성프리맨

갈수록 마음이 작아지는지 별거 아닌 일로도 화낼 일이 많아졌다.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로 비유하자면 [버럭]이의 영향력이 상당히 커진 거려나.


아내와의 다툼은 어느새 일상다반사가 된 지 오래다. 오늘도 그랬다. 의견 차이가 발생했는데 어떻게 해도 참 쉽게 좁혀지질 않는다. 이유도 어쩜 매번 이렇게 비슷한지..


결혼 10주년이 코앞이건만 쉽지 않은 게 부부생활인 거 같다.


웃기게도 그렇게 싸우다가 이유 없이 얼굴이 씰룩거린다는 거다. 뭔가 말을 하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되면서 알 수 없는 웃음 같은 게 몽글몽글하게 올라온달까?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잔뜩 화가 나 있음을 어필하고 싶은데, 이미 눈치를 챈듯하다.


"뭐야. 웃어?"


다시 화를 내보려고 억지로 노력해 보는데 이미 한번 터진 웃음을 감추기란..


여름이었다.




지극히 게으른 사람.

내 몸만 소중히 여기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집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자.


40대에 접어든 내가 집에서 얻은 수식언들이다. 하나 같이 부정적인 의미가 느껴지는 건 어째.. 기분 탓이겠지?


과연 지금의 내 모습이 오래전부터 이상적으로 그리던 40대의 모습은 맞을까?


차마 거짓을 고할 순 없으니 그렇다고는 말 못 하겠다. (양심은 있는 편.)


늘 생각은 하고 있다. 어찌해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그 시작점은 일단 우리 가족이 먼저라고. 하지만 매번 다짐은 해변가에 쌓아 놓은 모래성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잔 파도가 몇 번 밀려오나 싶더니 닿기도 전에 허물어져 버렸다.


다짐하고 허물어지고의 반복 끝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좋은 남편, 쿨 대디, 영포티(이건 아닌듯한데..), 프로백수.. (쓰면 쓸수록 이상해지는 거 같네.)


여름이었다..




아내가 알바를 그만두기로 했다.


"괜찮지?"

"어.. 당연하지‼️"

"이상하네? 뭔가 뜸이 긴 거 같이 느껴지는데? 왜? 내가 돈 안 번다고 하니까 속상하냐? 난 뭐 좀 쉬면 안 돼?!"

"아니.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감히 뭐라고 일을 해라 마라 하겠어. 어딘가에 메여서 일 년 넘도록 해준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지.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

"착한 척은 그만하고. 아무튼 그런 줄 알아."


그 말을 건네는 아내도 왠지 씁쓸해 보였다. 사실 자의로만 그만두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러 가지 상황과 복잡함 속에 보이지 않는 손이 아내를 퇴사로 이끌었달까. 이 또한 흘러가는 흐름이니 거스르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로도 아내는 몇 번이고 퇴사에 대해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괜히 일찍 그만둔다고 한 걸까?"

"좀 더 다닐 걸 그랬나?"

"나도 나이가 있는데.. 언제 또 카페에서 일해보겠어. 누가 날 써주기나 하겠어?"

"식당 일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괘씸하네. 내가 이 나이에 식당일 할 걸 생각해야겠어?? 넌 일 안 하냐?!!!!!"


큰일 났다. 불똥이 내게 튀려 한다. 도망쳐야 하는데 우리는 24시간 붙어 있는 사이. 딱히 도망쳐서 갈 곳도 없으니 고스란히 전해지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 귀에서 뭔가가 흐른다.


'설마 피?'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다시 느껴보니 눈에서도 뭔가 흐르고 있었다. 등에서도 흐르고 목에서도 흐르고.


아내의 말과 시선이 내 몸에 닿자 여기저기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땀과 눈물이 섞인 듯한 찝찌름한 바닷물 같은 무엇이.


"소설 쓰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이제 당신도 뭘 좀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반박해서도 안 되는 일이고. 그러다 지난여름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바쁘게 청소하러 다닌 시간. 밤마다 파스를 붙였던 순간. 세금과 대출금을 정리하며 불안해하던 모습.


바닷가에 살면서 놀러 가지 못한 채, 드라이브하면서 슬쩍 보는 게 전부였던 지나간 시간들.


여름이었다...




"아니.. 뭐 끝맺음 말마다 [여름이었다]만 쓰면 다 되는 건가요?"


그렇다고 배웠다. 누군가 트위터에 썼었다고 하던데. 아무리 이상한 내용이더라도 마지막 맺음말에 '여름이었다.'만 쓰면 그럴싸하게 바뀐다고 했다.


여름이었다.png [출처] https://www.mad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9102


아내와 다퉜던 순간도, 후회되는 순간도 한 페이지에 몰아넣은 다음 '여름이었다'로 끝맺음하며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처럼 묻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서 다시 아내의 말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만 소설 쓰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대답을 @#$@#$@#$@#$"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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