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걸음
"오빠! 이거 꼭 봐. 거울치료가 필요해."
며칠 전부터 아내가 보기 시작한 예능은 하나 같이 [이혼]을 다루고 있었다. 순간 뜨끔했다.
'설마...'
혼자 외로이 독방에서 울면서 늙어가는 내 미래가 상상됐다.
"미안해. 그냥 다 잘못했어."
라고 하진 않았지만 속에선 지나간 일 중 큰 과오가 있었는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잘못한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보라면 좀 봐‼️ 이게 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니까? 나도 이거 보면서 오빠에 대해 연구 중이라고."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한 화를 보기는 했는데..
재.미.가.없.었.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도 입맛에 안 맞으면 먹기 힘들듯, 보고 있는 게 괴로웠다. 남의 가정사도 좋지만 우선 우리 가정부터 챙겨야 하는데. 그래도 실권자인 아내의 말을 무시할 순 없으니 시늉은 해봐야겠지?
"먼저 보고 얘기해 주면 새겨들을게."
"ㅡㅡ+"
"보겠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한편 정도는 더 보도록 해야겠다.
결혼한 지도 어느새 10년. 길다면 나름 긴 시간인데, 우리의 모습은 많이 변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역할은 확실히 뒤바뀌었다. 지금 우리 가족의 키를 잡고 있는 건 바로 아내. 이래저래 내가 툴툴 대기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편이다.
그리고 나도 몰랐던 장래희망을 실현하게 됐음도 깨달았다.
'내 꿈이 셔터맨이었을 줄이야.'
물론 셔터맨의 정의가 이런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현재 아내에게 의존하며 최소한의 활동만 하고 있으니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니다.
오빠로서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빠로서 제 역할에 충실한가? 충실했나? 충실하려고 하는가?
메아리처럼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근원은 다름 아닌 아내의 목소리였다.
"어??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 진짜 소리였네? 하하. 진짜 신기해."
"정신 좀 차려 으휴."
지나간 결혼생활을 되돌아보면 결코 100점짜리 남편이라곤 못하겠다. 스스로 점수를 매겨보자면 흠.. 흐음..
70점.. 정도면 괜찮을까? 내가 너무 겸손한가 헤헷.
"40점 줄게."
"..."
"그것도 후하게 쳐서."
비상등이 켜졌다. 진돗개 1호 발령‼️ 그래서 그토록 이혼 예능(이라 하고 다큐라 불러본다..)을 열심히 봤구나.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말을 이어갔다.
"요즘 고독사가 사회 문제라더라고. 참 안타깝지?"
"뭐?"
"혼자 사는 노인의 고독사 비율이 높다더라고. 참 슬프다 그치?"
"..."
"지금도 이렇게 몸이 삐걱거리는데. 만약 혼자 산다면 나도 참 위험해 그럴 거 같지 않아?"
"오빠는 여전하구나. 언제나 본인이 먼저네."
'망했다.'
생각해 보니 항상 내가 먼저긴 했다. 모든 게 내 위주. 모든 기준 중 가장 높은 우선순위는 [나의 힘듦]과 직결돼 있었다. 묵묵히 뒤에서 서포터를 하게 된 아내의 불만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거짓말하지 마. 오빤 몰라."
그래도 아직까지 오빠라고는 불러주니 아직 돌이키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구나.
"권했던 내용 한번 봐볼게. 보고 나서 이야기 나누자."
"그래."
좋은 마음으로 만났던 커플이 결혼을 하고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됐을까?
알 수는 없다. 수많은 사유가 존재할 것이고, 단지 결혼으로 묶여 있었기에 단순히 사귀던 사이보다는 파장이 더 크겠지라고 막연히 추측해 볼 뿐이다.
언제나 똑같다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누군가의 인내와 양보 혹은 희생을 바탕으로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적어도 결혼 10주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제대로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같이 붙어서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과거 그 어떤 시점보다 다툼의 빈도가 늘어나기도 했다. 당연스럽게도 다툼의 이면에는 [잘 살아보자]라는 기조가 깔려 있긴 했지만, 상처 난 마음은 그리 금세 회복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마음이 회복되기 전, 또 다른 상처를 주고받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똑같은 자리에 더 깊은 상처를 남겨놓는다.
'땜빵만으론 부족해.'
아이가 있는 위기의 부부라면 합의하에 이런 상황을 가져볼 수도 있겠다.
"아이가 크고 나면 각자도생 합시다."
아이를 떠나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허용하기 힘들다면..?
그때는 서로를 위해 놓아줘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급속도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평행세계 속 또 다른 내가 있다면 상상하던 그 모습들 중 하나로 이미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독사하고 싶지 않아.'
혼자 산다고 무조건 고독사하리란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생각이겠지만, 그런 미래가 도래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어떻게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을지에만 집중하자.
먹고사는 것에 기울이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을 읽고 수용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고민 아닐까?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의 삶에서 아내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심도 깊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아내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본모습에 집중해 보리라. 좀 더 많이 대화 나누고, 바꿔야 할 부분이 있다면 큰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바뀌어야겠다.
언젠가 결혼 20주년이 허락된다면 그런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사람 됐다 오빠. 진작에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
10년 뒤의 내가 부디 그렇게 되어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