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할 아내를 기다리며

140 걸음

by 고성프리맨

별 생각이 없다.


'음.. 오늘도 역시 나답군.'


구체적으로 뭘 해야겠다란 생각을 안 하고 산지도 꽤 오래됐다. 처음 백수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지금과는 좀 달랐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해‼'


백수.. 아니지 아니야. [시간 부자]가 되고 나서 처음엔 정말 바쁘게 살았다. (그냥 부자라고 말해볼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ㅠㅠ)


24시간이 모자란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눈뜨고 이것저것 손대다 보면 최소 6시간 정도는 훌쩍 지나갔었다. 아무래도 회사 생활의 짬이 벗겨지기 전이어서였을 수도 있고, 늘 정해진 시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금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회사 다닐 때의 바이브를 전부 벗겨내 버렸다. 즉 뭔가를 하기 위해 엄청나게 애쓰지도 않고 있고, 흘러가는 내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포기했는가?라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단지 나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결이 예전의 노선에서 이탈했을 뿐이다. 여전히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내 삶이 망가지거나 막살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름 복작거리면서 소득 없이 바쁘게 살 때는 그래도 만나는 사람이 좀 있었다.


- 그래도 이 인간이 뭐라도 하긴 하려나 보네. 그렇다면 함께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겠어?!


사실 그래서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하려는 에너지는 비슷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했다. 사람인 이상 어찌 성공에 대한 혹은 잘 살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지 않고 싶겠는가. 그때만 해도 글은 부수적이었던 존재였다. 단지 무료한 시간, 바쁜 시간 중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의 틈을 허용하는 정도로만 여겼다. 지금처럼 글쓰기가 주된 삶의 행동 중 하나가 되리란 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글쓰기를 관뒀어야 했어!'


농담 삼아 던져보지만 결코 후회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글을 쓰는 루틴을 가지게 된 생활이 마냥 나쁘지도 않고, 오히려 행복함에 가까울 때도 많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쓰는 게 쓰지 않는 것보단 백만 배 낫다고 생각한다. 모르긴 해도 쓰는 것까지 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100% 완벽한 백수에 가까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가장 님이란 표현도 못하겠네."


아내의 알바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만 두기로 한 순간부터 내내 아내는 불안해 보였다. 말로는 후련하다 하면서도 행동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당장 본인이 알바를 그만둠으로써 잃게 될 금전적 손실부터 머릿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리라.


"그만두더라도 한번 가장은 영원한 법. 내게 있어 그대가 진정한 가장임을 잊지 않겠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던가. 난 이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의기소침해 있던 아내를 분노케 만들었다. 잃어버린 활력을 되찾게 하는 데에도 역시 말의 힘은 위대하구나.


"허튼소리 말고. 오늘 데려다주면서 가게 앞에 잠깐만 있어봐. 짐 좀 챙겨 올게."


잠시 후 에코백을 하나 들고 나왔다.


"생각보다 짐 별로 없지? 나 간다. 이따 봐!"


생각보다 아내는 미니멀리스트였구나. 아니 알바기 때문에 당연한가? 굳이 본인의 영역 표시를 크게 해 놓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정리한 에코백을 들고 오면서 아내의 소중했던 시간과 마음이 이 안에 담겨 있었겠구나란 생각을 해봤다. 이제는 짐 정리하듯 남겼던 마음도 회수해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어떠한 일이든 행동하면 먹고살 수 있게 된다. 물론 같은 노력대비 누군가는 더 많은 수확을 얻을 것이며, 누군가는 겨우 입에 풀칠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자가 되지 못한 삶을 비난하며 원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희망을 품든 원망을 품든, 이 세계는 멈추지 않고 흘러갈 뿐이니까.


이제부터 우리 부부는 먹고 삶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을 해야 한다. 엄밀히 따지면 가장 님인 아내의 몫인가(?)


"뒤질래?"


아내가 이런 말을 쓰진 않지만 방금 전 내가 위에 쓴 내용대로 아내에게 말을 꺼낸다면 험악한 말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평소처럼 열심히 웹서핑을 했다. 바닷가에 살며 진짜 서핑은 해보지도 할 생각도 없지만 웹에서라면 누구보다 강한 서퍼가 될 자신이 있다. 그렇게 웹의 바다에서 부유하던 중 눈길을 끄는 광고를 하나 만났다.


[SPC 기업 공채 모집 중!]


평소 같았으면 관심도 없었을, 내게는 파리바게트로 알려진 모기업의 공고를 홀린 듯이 눌렀다. 나의 경력과는 무관한 다양한 업무 분야의 채용공고가 쓰여 있었다. 쭉 훑어보다 창을 닫았다.


'대체.. 뭐 하러 공고를 본 거야?'


F&B 사업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닌데 어째서 기업의 공고가 눈에 띄었을까? 혹시 취업전선에라도 다시 어떻게든 뛰어들어야겠다 생각한 건가? 대견하기도 하여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현재의 시간부자 생활 혹은 놀이가 참 맘에 든다. 아내의 속은 비록 터질지언정.


'40대가 되었으면서 신입 공채 공고를 본다?'


현실성 결여된 아저씨의 망상은 꽤나 눈높이가 높구나. 마치 공고를 보기만 해도 누군가가 바라는 회사에 턱 하니 합격이라도 할 줄 안단 말인가? 여전히 망상 속 내 콧대는 높기만 하다.


몇 달 전에 제주도에 사는 지인 형이랑 대화했던 게 떠올랐다. 물론 그 형은 나와는 달리 리얼 부자이다 보니 상황은 좀 다르다. 형의 취미 중 하나는 [사워 도우 빵] 만들기이다. 회사를 관두기 전부터 꾸준히 노력했고, 형수님의 핀잔을 들을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워도우 빵을 만들었다.


"얼마 전에 타르틴 베이커리 채용 공고가 올라왔길래 나 거기 지원했었다."

"엥? 뭐 하러요? 돈은 상관없잖아요."

"돈 때문이 아니라 빵 때문이다! 나 진짜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거든. 아예 기초부터. 그런데 떨어졌어 하하."

"혹시.. 개발경력 이런 거 이력서에 써서 아닐까요?"

"내가 미쳤냐 그런 거 쓰게.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경력도 없고 나이도 많고. 그래도 아쉽네."


순간 형이 달리 보였다. 뭐 평소에 얼마나 별로로 봤으면 달리 봤겠어? 이런 얘기가 아니라 형의 성향을 약간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뭔가를 정말 사랑하기에 해보고 싶어 지원한 그 용기에 속으로만 박수를 보냈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형한테 말을 해버렸다.


"사실.. 전 글 쓰고 있어요."

"오? 뭔데?"

"뭐.. 웹소설 같은 것도 끄적거려보고 있고, 에세이 같은 것도 써보고 그래요."

"너랑 어울린다."


비록 형은 내 글을 읽어주진 않지만(읽어 준 적이 있다면 사과할게요 ㅎ) "뭐 그딴 걸 하고 있어!"라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너랑 어울려."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묘하게 이게 참 큰 힘이 됐다.




어찌하면 알바를 그만두고 의기소침해할 아내에게 그때의 형이 내게 해준 것 같은 말 한마디를 해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려다 바로 포기했다. 내 머리와 감성으로는 어떻게든 아내의 심금을 울리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해볼까?'


흠.. 모르겠다. 이런 건 보통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하는 건데 말이지. 앞으로 1시간 30분 정도 뒤면 아내의 알바생활도 엔딩을 맞이한다.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원래 끝이 없는 법이건만, 오늘은 한번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말을 걸어보고 싶다.


다른 건 몰라도 그대와 붙어서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건 매우 좋다고 얘기하고 싶다. 내 말을 듣고 치를 떨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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