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걸음
춥고 컴컴한 휴게소에서 차로 복귀하던 중 들려온 비명소리와 함께 아내가 넘어졌다. 너무 놀라면 말을 잃는다고 하던가. 그저 다가가 일으켜 세우는 행동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옆에 있던 작은 아이는 나보다 더 놀랐는지 연신 걱정 어린 시선과 말로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아... 괜찮아요?"
'위로의 말 한마디 못 건넨 나보다 아들이 훨씬 낫구나.'
차로 복귀해 등을 켜고 상처를 확인했다.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었는데 정확한 통증은 하루 정도 지나야 알 수 있을 듯했다. 일단 찰과상을 입은 부위를 확인 후 밴드를 붙였다. 멍하니 쳐다보는 내가 의식됐는지 아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춥다고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면 안 되겠어. 발밑에 뭐가 있는지 안보이더라."
"조심 좀 하지."
이미 넘어져서 다치기까지 한 마당에 조심하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긴 했는데 이미 말은 입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의기소침해 있던 아내는 별 다른 말을 이어가지 않음으로, 나의 말을 막아세웠다. 다시 한번 걱정하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엄마. 어떡해?"
"엄마~ 안 아파요?"
다시 한번 아이들이 나보다 나은 인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고 아이 등원 준비를 해야 했다. 분명 어제 잠에 들 때만 해도 일찍 일어나 챙기겠노라 다짐하며 잠에 들었었는데, 웬걸? 피곤함과 귀찮음이 한꺼번에 몰아닥쳐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고고! 팔이야!!"
못 들은척하고 잠에 빠진 척했다.
"아잇! 정말!"
"으응??"
못난 남편은 이 와중에도 아픔을 뺏어오기로 마음먹었다. 선통필승.
"아... 온몸이 쑤시는구려. 장거리 운전의 여파인가? 무릎도 아프고."
"됐어! 바라지도 않았거든?"
"아빠! 엄마가 저렇게 아프다는데 아빠도 정말!"
"엄마 그냥 쉬어요... 네? 쉬면 안 돼요?"
"그럼 아침은 누가 차려주고?"
"그냥 내가 차릴게요? 어? 편의점 가서 만 원짜리 도시락 사다 먹으면 되잖아요!"
'뭐 만원?! 편의점 도시락 중에 만 원짜리가 판단말이야?'
절대로 가만둬서는 안 될 일.
"미안한데 오늘 아침 좀 부탁할게."
"됐어! 그냥 해본 소리야. 난 넘어져도 내가 밥을 차려야 하는 신세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
일어난 아이와 아내를 뒤로하고 침대에서 뒤척였지만, 맘은 편하지 않았다. 어느새 잠도 달아나버렸다. 결국 10분 정도 지난 뒤 따라서 일어났다.
멍하니 식탁의자의 지정석으로 걸어가 걸려 있던 로브를 입고 앉았다.
"뭔데?"
"......"
"밥 먹겠다고?"
"......"
"생강차 마시겠다고?"
"......"
무언은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건지 아내가 내 앞에 따뜻한 생강차를 한잔 가져다줬다. 예전과 달리 감기가 한번 걸렸다 하면 쉽게 낫지 않는 관계로 이제는 약뿐만 아니라 차에도 의존 중이다. 그 덕에 들끓던 가래도 많이 완화됐다.
"팔은 어때? 병원 데려다줄까?"
"착한 척하지 마라? 어디서 오버를!"
나의 진심을 호도하는 방법이 다양하기도 하여라. 어찌 남편이 돼서 아내의 아파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단 말인가. 하지만 별 수 없이 그냥 두고, 노트북을 켰다. 이 와중에도 글은 써야 오늘 하루 맘 편히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테니.
예전과 달리 넘어지거나 콜록거리는 증세 하나조차 쉽게 흘려 넘기기가 어려워졌다.
나이도 제법 들어가고 있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던 윤동주 시인께 빙의되는 마음이랄까. 괴로움의 감정은 상이하겠지만 어쨌건 내 곁의 소중한 이가 앓는 소리 하나만 내도 두려움이 엄습한다.
확실히 건강검진을 하나 받는 일에도 민감해지고,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문제도 삿되이 넘길 수가 없어졌다. 매 순간이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이러한 일을 가리켜 [기우(杞憂)]라고 하던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불안함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걸 어쩐단 말인가.
"뭘 멍하니 쳐다보고 앉았어?! 응?"
초점 없이 멍하니 있었을 뿐인데 하필 시선이 아내를 향해 있었나 보다.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미안해."
"아오. 또 시작됐네. 척하지 말라했지?"
그래도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이런 순수한 마음을 아내도 알아주리라는 것을.
"혹시 글 쓰려고 일부러 상황연출했니?"
"......"
"없었던 대화 쓰지 말라고 하니까, 일부러 대화를 만들어 내는 거 아니냐고?"
반박하지 않고 배실배실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내의 통증이 잘 치유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