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할 땐 사랑 얘기가 제격이지.

178 걸음

by 고성프리맨
귀귀


유부남이 조심해야 될 제1금기 중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과거사]다.


"오빠! 난 쿨해. 괜찮으니까 말해봐. 누군 뭐 첫사랑 없었나. 그 정도도 이해 못 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옳다구나 하고 떠벌린다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결국 잘되면 [이혼숙려캠프] 같은 곳에 소환당할 빌미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누구 좋으라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딱히 기억도 안 나. 그런 일이 있었나 싶기도 해."

"에이. 다 기억하잖아. 그냥 말해봐. 궁금해서 그렇다니까?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어디 과거 얘기나 들어볼까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헉! 나도 모르게 술술 불 뻔했다.'


본능적으로 변해버린 아내의 살기 어린 눈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오늘 산채로 호랑이에게 먹잇감이 되는 날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 왜 말을 하다 말어. 분위기 좋았을 거 같네. 스무 살 초반에 아주 풋풋하고 손만 스쳐도 짜릿짜릿하고 막 그랬겠네? ^^"

"그런 일은 없었다."

"......!"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난 플라토닉 러브의 신봉자였었어. 내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해. 걱정 마라."

"내가? 오빠 걱정을? 다 늙어빠진 남편 걱정을 한다고??"


주위가 분산됐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면 된다.


"요즘 경기가 어쩌고- 바깥에 날씨가 어쩌고-"

"......"


눈치 없이 관심도 없는 주제로 화제를 돌리려 했던 게 너무나도 티가 나버렸다.


"어이 형씨. 하던 얘기나 마저해. 그러니까 아까 말은 20여 년 전에 첫사랑이 있었다는 거네? 그렇지? 맞지?"

"내겐 오직 그대..."

"닥쳐."


이쯤에서 정정하겠다. 호랑이 굴에 들어갔을 때 정신만 차려도 살 확률은 있다. 단지 몸이 성해서 나오지는 못할 수 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애초에 그 어떤 떡밥도 물지 말았어야 깔끔하게 처리되었을 상황에 하나라도 물어버린 내 실수를 인정한다.


물론 아내는 배려심 깊고 이해와 포용의 화신이기에 솔직히 내 과거를 듣는다 해도 충분히 수용해 줄 대인배이긴 하지만 ^^... 굳이 안 해도 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쯤에서 아내의 단골 레퍼토리가 하나 튀어나왔다.


"휴우 좋았네 좋았어. 나야말로 불쌍하지. 지는 즐길 거 다 즐겨놓고, 생각해 보니 또 열받네? 첫째 가졌을 때 어떻게 임신부한테 그렇게 못해줄 수가 있어? 내가 아주 평생의 한이다 한이야!"


임신했던 시절을 얘기하면 나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치트키]. 솔직히 내가 잘못한 게 많긴 하다. 아내가 쥐가 났다고 해도 마사지를 해준 적도 없고 도리어 "쥐 풀렸으면 어서 자 :) 나 내일 출근해야 해."라며 화를 돋우는 능력까지 겸비했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당시엔 출퇴근만큼 중요한 게 없다 여기며 아내를 돌아볼 생각은 왜 못했던 걸까.


"원래 인성이 그 모양인 걸 어째. 돌아간다고 그 성격이 바뀔까? 나니까 데리고 살아주는 줄 알아. 나 만나기 전엔 실컷 데이트하고 즐기다, 나 같은 현모양처 만나서 사람 된 거야!"


억울하다. 아니지 이런 걸로 억울해하면 아니 된다. 아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어서 정정해 주려다 말았다.


'나..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더 이상의 말을 보탬은 구차함만 가중시킬 뿐이니 이하 생략하겠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린 시절 사랑에 관한 산문집 같은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제목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상상 속의 사랑은 막연했지만, 한편으로는 설레는 것이었다. 물론 결혼생활에 100% 만족 중인 난 당연히 매일이 설렌다 ^^v


좀 더 커서는 사랑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배웠다. 무릇 남녀 간의 사랑에만 국한되어 있던 생각은 확장되어 여러 방향으로 열렸다. 주제넘은 신에 관한 사랑, 인류애 등. 남녀 간의 사랑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담기엔 너무나도 큰 주제의 사랑이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얻었다. 그렇게 알게 된 [자식에 대한 사랑].


내 인생에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40여 년을 사는 동안 많은 모습의 사랑을 직간접적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연유로 이제부터 남은 내 삶은 "아내를 위하여-"

"오글거리니까 그만해."


일단 공식적인 형태는 아내를 위함으로 포장되었으니, 이제는 할 말을 하겠다.


사실 난 개인주의가 강한 사람.

이제부터 남은 내 삶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게 :)", 선은 넘지 않으면서.


또 하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

내가 이러고 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전에도 이 패턴으로 글을 쓰던 거 같은데...... 아하! 또 뭐 샀구먼유?

"쉿!"


비밀은 원래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원칙. 그냥 독자와 나 둘이서만 묻어두도록 하자. 어차피 아내는 시간차를 두고 이 글을 읽을 테니, 그전까지는 우리 사이의 비밀은 완벽히 지켜질 것이며, 거사는 이미 끝나 있을 테니 걱정은 뒤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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