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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배깅(Tea-bagging) 배틀

193 걸음

by 고성프리맨

'아니 이걸 어떻게 참아?'


참고 또 참아보려 했건만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꽃을 감출 수가 없다.


'자랑... 자랑이 하고 싶어‼️'


대단한 자랑거리라도 있냐고? 없다.

그냥 들썩 거린다. 아⎯⎯ 도저히 못 참겠다.


"oo야, 너 못 깬 3번째 스테이지 마지막판 아빠가 깨버렸다 ㅋ"

"아빠! 놀리지 마요!"

"놀리긴. 이거 왜 이리 쉽냐? 너 하는 거 보고 왠지 몇 번 시도해 보면 깰 거 같긴 했는데, 해보니까 되네? 이렇게 쉬운 걸 못 깨고 뭐 한 거니? 응? 그냥 이렇게 딱! 박자 맞춰서 버튼 연타하면 되는 거 이게 어려워?"


결국 나의 도발에 큰 아이는 삐졌다.


"안 해! 다 지워버려! 아니 부숴버려 컴퓨터!"

“어허! 이 녀석이? 실력이 모자람을 탓해야지 어찌 컴퓨터 탓을 하는 게얏!"


예상된 결과였다. 결국 자랑의 끝은 파국.

하지만 나의 [티배깅]이 먹혀들었다.

어른을 상대로 했다면 씨알도 안 먹혔을 도발인데 아이에게는 쉽게 먹힌다.


미안하다 아들아. 못난 아빠라서. 그래도 3번째 판은 쉬웠단다.


[아이가 좋아하는 게임 a.k.a 얼불춤]



[티배깅(Tea-bagging)]

: 티백을 차에다 담갔다 빼는 모습과 유사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어휘는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부터 속어로 사용되었으며 1998년에 개봉된 Pecker라는 영화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미가 한번 바뀌어 게임에서는 자신이나 팀원들끼리 죽인 상대 캐릭터 위 혹은 주변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행동을 반복하며 깊은 빡침을 도발하는 행위를 '티배깅'이라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상대를 모욕하고 스포츠맨십을 무시하는 비매너, 무례로 통한다. (나무위키)


티배깅의 현장.mp4


재밌었다.

첫째에겐 신나게 티배깅 했으니, 이제 둘째 차례.


'넌 뭘로 요리해 줄까?'


아이가 긁힐 만한 부분은 충분히 알고 있다.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만데, 아비로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겠어?

때마침 운동 중인 둘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턱걸이 자세가 그게 뭐냐?"

"쇼츠에서 봤는데 이렇게 해야 안 다친대요."

"아닌데? 자세가 글렀는데? 그렇게 하면 어깨 다친댔는데?"

"뭐. 아빠는 한 개라도 해요?"

"아니. 그렇지만 자세는 다 알지. 일단 니 자세는 아니라는 거."

"하지도 못하면 조용히 하실래요?"


'허? 이 녀석 봐라?'


일단 작전상 후퇴. 운동은 내가 훨씬 못하는 관계로 오히려 내가 긁힌다. 기회를 엿봐야 한다.

잠시 후 [로블록스]를 즐기는 둘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과의 1 vs 1 대전.

살그머니 다가가 태블릿으로 열심히 플레이 중인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 하지 마요!"


그러다 슬쩍 두 눈을 가렸다. 그 틈에 형의 공격이 통했는지, 화면 속엔 누워 있는 둘째의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

"와. 진짜 못한다. 이렇게 죽는다고? 형 엄청 잘하네. 고수네?"

"장난치지 마요. 지금 그럴 기분 아니니까..."

"아니 못하는 걸 못한다고 하지. 거기서 컨트롤 딱 이렇게 못함? 안 해본 아빠가 더 잘할 듯. 하아 게임에 소질 없네."

"으아아아아아! @#$@#$@#$"


결국 폭발해 버린 둘째는 울음을 터트렸다. 고작 초등학교 1학년을 상대로 나의 도발이 먹혀들었긴 한데 결과는 최악이었다.


"오빠! 그만 좀 해. 애들한테 뭐 하는 거야?"

"ㅇㅋ"


당신은 모를 거야.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자고 있는 중이었는데 뭔가 숨이 턱 막힌다.


"으읍.. 뭐야?"

"아빠 내가 기술 걸었는데 빠져나올 수 있어요? 어디 해봐요."

"어이. 이거 안 놔? 비겁한..."

"어른이면서 이것도 못 빠져나와요?"

"오냐. 오늘 아주 버르장머리를 싹 다 리셋시켜 주마."


어라? 근데 이게 웬걸. 아들의 기술을 풀어낼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약하다고? 에이, 설마.'


안간힘을 쓰며 풀려했건만 그럴수록 아이의 조임은 더욱 강해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싫은데요? 아빠도 엄청 약하네."


살짝 열이 좀 오르는 기분도 들고, 이상하네. 내가 아이 상대로 화가 난다고? 나고 있다고? 말도 안 돼.

생각하는 틈을 타 아이가 좀 더 강하게 압박을 해왔다.


"아.. 아야! 아파! 그 그만해!"

"항복이쥬? 못참겠쥬?"

"......"

"약해빠졌쥬? X킹받쥬?"

"너 이 녀석 아빠한테 그게 무슨...!"


결국 온 힘을 쥐어 짜내 아이의 속박기술로부터 풀려나왔다.

발 빠른 아이는 이다음 나의 행보를 예측이라도 한 듯 부리나케 도망쳤다.


"하아아..."


멀리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도 나한테 도발했잖아요. 나도 그래서 한 거예요. 어때요 당해보니까!"


할 말이 없었다. 막상 당해보니 이거 굉장히 기분 나쁜데.

이래서 역지사지... 역지사지 그랬구나.

하하 녀석. 내게 이런 교훈을 일깨워주다니.


"아빠 화 안 났다. 우리 잠깐 대화나 할까? ^^"

"거짓말!"

"아닌데? ^^ 웃고 있잖니."

"... 정말이죠?"

"그으럼. 아빠도 놀려서 미안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둘째는 나한테 걸어왔다.

이제 몇 걸음 뒤면 내 앞에 도착이다.


"정말이죠?"

"그으럼. ^^"

"그러니까 아빠도 나한테 맨날 놀리지 좀 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까이 온 아들을 낚아챘다.


"으읍. 뭐야!"

"뭐긴 뭐야? 이제 네 차례지."


받은 만큼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40대 아빠의 진심을 어디 한번 느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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