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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망각을 거듭하다.

196 걸음

by 고성프리맨
망각(忘卻)은 개인의 장기 기억에 저축한 지식을 잃는 것이다. - Wikipedia



언젠가부터 단어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익숙하게 사용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 뭐였더라?'


갑갑할 노릇이다. [기억력]이 그렇게까지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빛이 바래가고 있다. 이 또한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스러운 현상이겠거니, 하지만 자꾸 맴돈다.


'아... 갑갑해 죽겠네.'




"자기야. 폰 좀 제발 챙겨 다녀."

"어, 어."

"내 말 들은 거 맞지? 아무 데나 널브러뜨려 놓지 좀 말고. 그러다 잃어버린다니까?"

"어, 어."

"아니 진짜로 내 말 들은 거-"

"그래서 잃어버렸어? 내가 폰 잃어버렸냐고?"

"그게 아니라, 매번 어디다 뒀는지 잘 모르고 헤매니까 그렇지."

"알아서 할게‼️"

"......"


다시 직장에 나가기 시작한 아내의 말엔 엄청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역시 [돈 = 빠워].

물론 아직 일주일 밖에 안 됐으니 급여를 받기까진 한참 남았다.


'뭐 폰 챙겨서 다니라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매서운 레이저 눈빛을 맞게 될 테니 속으로만 꿍얼거렸다.




"오빠! 이거 프린트 어떻게 하는 거더라?"

"휴. 내가 벌써 몇 번째 알려줬는데 어? 확인도 안 하고 어?! 이렇게 딱! 클릭! 어? 이걸 못해서?"

"기분이 나빠질라고 하는데? 알면 얼마나 더 안다고 고깝게 말이야. 사람 기분을 아주 못쓰게 만들려고 작정을 한 건지. 어디 바깥일 하는 사람 앞에서 어?! 감히?!"

"......"

"말 줄임도 줄여! 어디서 눈을 떽 부릅뜨고 말이야! 출력해 당장!"

"네 해드리겠습니다."


분명 사용법을 여러 번 알려줬는데, 어째서 매번 저렇게 출력하는 건지.

의도적인 망각인지, 자연스러운 망각인지, 뭐가 됐든 망각했잖아?




"아휴! 깜빡했다. 아아아 집에 갔다 와야 해."


지하주차장에 다 도착해서 이제 시동 걸고 출발하기 직전인데, 불안감을 조성하는 말을 내뱉는 아내.


"뭔데? 그러길래 내가 매번 말하잖아. 한 번에 딱! 빠뜨린 거 없이 잘 챙기라고. 그게 안될 거 같으면 [체크리스트] 만들어서 체크하고, 그것도 안되면 공유 캘린더에 일정이라도 생성해 놓으면 내가 알려주겠다고 했니? 안 했니?"

"거 쫑알쫑알 말 많네."

"!"

"어딜 감히 바깥일 하는 나한테 쓰읍! 기다려 갔다 올 테니."

"..."


망각의 일상화. 하루라도 까먹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는 게 분명하다. 아니 그래야만 해. 그러지 않고서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까.




맨 위에 썼던 [나의 기억력]에 관한 내용은 사실 서른 즈음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항상 기록보다는 두뇌를 믿고 의존해 왔던 터라 처음 마주하게 된 망각 앞에서 나는 그만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었다.


"에이, 우연이겠지. 요즘 피곤해서 그래."


우연이라 여겼던 망각의 횟수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결국 난 백기투항해 버렸다.

더 이상 내 머리만 믿었다간 큰 낭패를 볼 게 분명했다.

선택이 필요했다.


[앞으로는 기록해야겠어.]


망각을 보조할 도구 역할, 나는 스스로 기억 보조 장치 역할을 자청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기록과의 싸움.

저 당시만 해도 정말로 기록에 가까웠다. 글을 쓰는 게 아닌 [일정, 메모] 작성에 충실했다.


한결 마음은 가벼워졌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나의 두뇌를 기억력 저장 장치로 사용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대신 [선택과 판단]만 잘해주기를 빌자.




그런데 아내는 다르다.

아무리 얘기해도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보란 듯이 망각을 일삼는다.

망각에도 숙련도가 있다면 아마도 베테랑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터.


-아니... 이렇게까지 디스하고 나면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겠어요?


대신 다른 장점이 넘쳐흐르는 분이시다 ^^.

신은 참 공평해. (무신론에 가까운 유신론자가 하는 말)

그렇다면 내가 아내의 기억 보조 장치 역할을 한번 해볼까나?


"자기야. 오늘 일정이 뭐 있어?"

"음. 뭐 딱히? 왜?"

"아니 오늘 자기의 손발을 대신해 캘린더에 해야 될 일을 전부 기록으로 남겨줄까 해서."

"...... 아니 하지마. 숨 막히니까."

"아니 아니. 맨날 까먹고 그러는 거보단 이렇게 하는 게 훨씬 낫다니까?"

"싫어. 하지 마. 나 대신 바깥 일 할 거 아니면 잠자코 있숴!"

"흠. 네."


내가 잠시 착각했었나 보다. 나는 절대로 아내의 기억 보조 장치 역할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어.

그전에 내가 화병을 얻을지도 몰라.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부부싸움으로 번진다. 그것만은 제발.


"준비됐으면 들어와. 언제든 싸움할 준비는 다 됐으니까."

"... 무슨 그런 섭한 말을. 난 그저 당신의 깜빡거림 현상을 완화시켜 주려던 것뿐이오."

"알겠는데, 난 그렇게까진 못하겠어. 너무 힘들단 말이야. 나도 내 방식대로 노력 중인데 그건 몰라주고. 내가 한 말 기억해 못해?"

"응? 무슨 말?"

"거봐! 지도 내 말 귀담아듣지도 않음서! 이것도 의도적인 망각이라고 봐 나는."


거참. 듣고 보니 할 말이 없네.

그런데 나한테 뭐라고 말했었더라?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었나?

어쩜 이렇게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


그토록 자랑하던 나의 기록습관을 뒤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아내가 한 얘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빠는 본인 위주라서 그래. 내가 오빠의 취향이라던가 기분이라던가 그런 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을걸?"


아아, 내가 착각하고 살았구나.

나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오히려 반대였어.

내가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않는 사소한 것들을 아내는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내가 나를 생각하고 존중해 주는 기억을 망각하고 살았어.'


옛말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라고 한 게 딱 들어맞는다.


지금부터는 조금 더 보완해야겠다.

정말로 잊지 말아야 될 기억의 비중을 조절해야겠어.

눈을 들어 아내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뭘 야려?"


난 그만 다시 눈을 깔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 아직 한참 남은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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