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걸음
오늘의 제목을 뭘로 지어볼까 고심한 끝에 다시 또 사자성어를 택했다.
내가 한문과 고사성어 학습에 관심이 많냐고 물어보신다면... 오히려 그 반대.
"큰 관심 없습니다."
그렇다면 뭐 하러 굳이 한자를 들먹이는 걸까?
한자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표의문자, 즉 한 글자마다 의미가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보기에는 4글자로 이루어진 조합일 뿐이더라도 길게 늘어 쓴 문장 못지않은 효과를 가져온다 이 말씀.
압축과 간결함의 미학 되시겠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면 "조금 있어 보이지 않을까요?"가 더 정확한 대답이 되겠다.
뜻은 특별하지 않다. 그냥 안부인사로 생각하면 된다.
"최근 헤어진 후 무탈하게 지내셨는지요?"를 네 글자로 줄이면 [별래무양].
실생활에서 한번 써먹어보자.
"별래무양 하셨습니까?"
"버... 벌레 뭐요?"
말뜻을 못 알아챈 상대를 보며 음습한 웃음을 지으면 되시겠다. (???)
-아니 당신이 그렇게 고사성어를 잘 알아? 어디 나랑 한번 붙어볼까?
"거절하겠습니다."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어쩌다 하나 알게 된 지식에 취해 여기저기 알려야 직성이 풀리는 본좌에게 심도 깊은 대결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숙명이다.
쓰다 보니 오늘도 결국 농담 따먹기에 가까운 글이 되고 있다.
무게가 없다느니,
이런 것도 글이라고,
안 본 눈 삽니다,
이럴 시간에 집안일이나 해라,
절필해 버렷!
......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래도 이런 평균 이하의 글을 쓰는 이가 있어야 음양의 조화가 어우리 지지 않겠는가.
굳이 내가 음양 중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조용히 자리를 뜨는 수밖에.
하나는 정정해야겠다. 음양의 비유가 등급과는 무관한데, 그냥 가져다 사용했다.
오늘도 뭐 특별한 일 없이 무탈하게 보낼 예정이다.
아니 반드시 그랬으면 좋겠다.
"오빠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예정이야? 주말인데 그래도 좀."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흠, 음, 크흠. 마트나 갈까? 점심 재료 사게."
"그러자고."
이렇게 할 일 하나 획득. 그녀의 전문 운전기사로서 무거운 책무 하나를 떠맡게 됐다.
"아빠. 됐다. 뭘 바래요."
"?"
"아니에요. 맞춰보세요."
맞출 생각이 1도 없는 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잠근다.
"...... 아빠 왜 저래요?"
"몰라. 냅둬."
가족의 시야에서 자연스럽게 은폐・엄폐 성공.
그리고 노트북을 켰다.
타닥타닥⎯⎯.
그리고 지금 그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시켜 드리는 중이다.
-문 열고 바깥으로 나가버려.
하아, 그런데 근심이 하나 생겼다.
-왜요?
보통 이렇게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쓰면 그래도 마무리 단계에 다다르곤 했는데, 아직 분량, 분량이 한참 모자라다!
이 말인즉슨 조금 더 시답잖은 얘기를 더 들어주셔야 한다 이 말씀.
-하아......
한숨의 의미 접수완료.
[말린다고 해도 듣지도 않을 양반이니 그냥 잡설 빨리 쓰고 마무리 해버리시오.]
어차피 이곳은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공간 아니겠는가, 하해와 같은 아량을 조금만 베푸소서.
솔직히라는 말을 자주 쓰는 입장에서 한 가지만 더 솔직해져 보려 한다.
"전 매일매일 글을 쓰고 있답니다."
누군가에겐 "오?!"라는 감탄사를 내뱉게 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어떤 글을 쓰는지 막상 눈으로 본다면, 감탄사는 바로 탄식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게 어디 자랑할 일인가?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고민도 충분히 필요한 법이거늘,
원래 정제되지 않은 원유 가격이 정제된 원료보다 싼 법이다. (확신 X)
처음에는 조금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했었다.
"요즘 뭐 하세요?"
"하하. 그냥 뭐 시간 죽이면서 글이나 끄적이고 있습니다."
"오올-?"
이걸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것도 어디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써먹을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며칠 후] 혹은 [몇 달 후]
"요즘도 글 쓰세요?"
"하하. 네."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시는지...?"
"아내가 먹여 살립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휴먼?"
상대방은 더 이상 집요하게 질문하지 않았다.
아마도 말을 하면서 흔들리는 내 눈동자 속에 모든 답이 들어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별래무양하다고 말은 하나 실제로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자.
그게 나다.
[별래무양 코스프레이어(コスプレイヤー)] 되시겠다.
쓰다 보니 뭔가 기분이 촉촉에서 축- 처지는 거 같다.
현실의 쓴맛이 입안에 올라오는구나.
'대충 그래도 분량은 맞췄잖아?'
그래. 인생 뭐 있나. 마트나 갔다가 집에 와서 점심 먹고, 다시 아내 직장 데려다주고, 픽업해 오는 일과를 해야지. 아무래도 이번 주말도 참으로 별래무양할 예정이다. 부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