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흔한 명절 풍경을 대하는 자세

211 걸음

by 고성프리맨

'앞머리나 살짝 잘라볼까? 미용실을 가지 않더라도 살짝 다듬는 건 전혀 문제 되지 않을 거 같은데.'


언제나 그렇듯 호기심에 의한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결국 욕실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 앞머리를 숭덩 잘라냈다.


"......"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순간 망했음을 직감했다. 라인도 맞지 않고 들쑥날쑥한 게 영락없이 쥐 파먹은 앞머리였다. 심호흡 후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미용실 좀 가서 자르라니까! 그런 건 제발 좀 가서 처리하라고."


거실로 나오는 내 몰골을 본 아내의 표정이 곱지 않다. 하지만 하루 이틀에 걸친 습관이 아니다 보니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더 이상 뭐라 하진 않았다.


"알아서 해라. 지 머리 지가 자른다는데."




머리카락을 셀프로 자른 이유는 있었다.


혹시 돈을 아끼고 싶어서? 꼭 그렇진 않다. 요즘 컷 비용이 올랐다고는 해도 두 달에 한번 꼴로 자르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럼 왜 그러는 건데요?


정확한 이유는 구정이 되어서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본다면 아내의 오빠, 즉 내게는 형님의 가족이 놀러 오는 날이돼서다. 되도록이면 깔끔해 보이고 싶었다.


그런 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앞머리가 깔끔해지진 않았다.


'아닌가? 그래도 오래 보다 보니 나름 귀여운데?'


이런 말을 스스로해도 부끄럽지가 않네. 어차피 속마음은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는 거 아니겠어?




형님 가족의 방문으로 인해 벌써부터 큰 걱정이 하나 있다.


-놀러 오는 게 싫은가요?


전혀 아니다. 아이끼리도 재미있게 놀고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이가 아닌가.

내가 걱정하는 문제는 아직 어린 조카 때문이다.


"아니 이 녀석이 올 때마다 이것저것 만지고 두드린다니까?"

"아휴. 오빠. 댁도 어릴 때 그랬을 거야."

"아닌데? 난 얌전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어쩌겠어. 아직 어려서 그런 걸."


집을 한번 둘러봤다. 많진 않아도 컴퓨터를 비롯해 이것저것 전자기기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

아이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을 물건들이 널렸다.

쪼잔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기도 전부터 그가 헤집고 다닐 모습이 상상됐다.


"아, 안돼!"




그리고 그날이 왔다.

주차장에 정차한 형님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마치고 트렁크에 실린 짐을 카트에 실었다.


"oo야 안녕. 많이 컸네?"

"으녕하세여."


'살짝 새는 발음이지만 제법 말을 잘하게 됐구나 이 녀석.'


그 모습에 잠시 취할뻔했다.


'안돼. 정신 차려. 귀엽다고 혹하면 안 돼.'


다시 정신을 붙잡았다. 오늘부터 내일까진 집중 또 집중이다.


'기기 쪽에 다가가기만 해 봐라 이 녀석.'


집에 들어온 조카는 잠시 동안은 얌전했다. 오랜만에 놀러 와서인지 두리번거리며 익숙해지도록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잠시 신뢰가 갈뻔했다.


"예전보다 덜 만지고 다니네요?"

"호호호..."


형수님의 웃음 뒤엔 아마도 '과연 그럴까요?'가 생략되어 있던 게 아닐까. 알아서 겪어보라는 그녀의 배려를 뒤로하고 예상보다 얌전해진 조카에게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

.

.

"꺄르르륵! 이거 너므 재이미가 이허여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집에 들어왔더니 난리가 났다.


"아, 아빠아... 너무 어질러졌어. 어떡해."


이 말을 내게 하는 걸 보니 큰 아이가 한 짓은 아니겠구나.


"아빠 어떡해요? 너무 어지르는 거 같은데요."


평소 기가 세서 형을 쥐 잡듯이 잡던 둘째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바닥은 자유롭게 끄집어 내어진 물건들로 한가득이었다.


'세상에... 저거 우리 애들 어릴 때 쓰던 거잖아? 아직도 안 버리고 있었네.'


오랜만에 보는 장난감이 반가울 뻔했다.

어질러진 바닥을 보며 내 정신도 반쯤 나가버리는 중이었다.


"아하하하... 녀석아."


그렇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조카에게 설득이란 걸 해봐야겠다.


"얘야... 남자라면 말이다. 무릇 정리라는 걸 할 줄 알아야 해. 그리고 이 물건들은 고모부의 애정 어린 손길이 탄 물건으로서⎯⎯"


한참을 주절거리며 설명했다. 조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남자 대 남자로서의 대화.


'그래 이 고모부의 진심을 이해해 주는 거니?'


"아흐읏 네헤 아르게써효오."

"알겠다고? 아유 그래그래. 앞으로는 얌전히 있거라?"

"네헤."

.

.

.


그랬던 녀석이 내가 아끼는 키보드를 두둥기고 있었다.


"으잉? 이 녀석이?"

"이거허 늘러보니까하재미가이써효오."

"......"


아까 알아들었다던 너의 그 표정은 무엇이었니?

고모부의 진심 어린 마음을 정녕 몰라준단 말이냐?

마음이 쓰렸다.

남자 대 남자로서의 대화를 훌륭히 해냈다고 믿었건만.


내가 풀이 죽어있자 녀석이 다가왔다.


"고오모부후?"

"응?"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의 풀 죽은 눈빛을 봐서였을까?

조카의 눈빛도 착잡해 보였다.


"이제 마구 누르지 말고. 가지고 놀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 놀으렴 알았지?"

"네헤."


더 이상 나는 그의 말을 믿진 않았다.


'어차피 말은 알았다고 해놓고 결국 너 만질 거잖아? 그래도 컴퓨터만큼은 안돼!'


연휴의 첫날부터 나 혼자만 열심히 진땀을 빼고 있었다.

누구도 내 마음을 모를 것이다.


'나 너무 힘들어.'


그래도 연휴 동안 잘 놀아보자 녀석아. 그사이 말귀를 더 잘 알아듣게 되면 더없이 좋고.

평소의 생활리듬은 바뀌었지만 일단 글부터 쓰고 시작하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