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
생활해 가면서 법주 스님은 홍심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출가한 입장에서 자녀를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홍심이 품 안의 자식처럼 느껴졌다. 낯설어하던 홍심도 법주 스님의 보살핌에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소탈한 스님의 하루 일과를 보며 언젠가 비구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법주 스님의 보살핌이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밤만 되면 떠나 버린 정이 생각에 슬퍼졌다. 돌아가신 엄마도 보고 싶었다.
’언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아주머니도 좋은 분이시니 잘 지내겠지. 나만 잘하면 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스르르 잠이 들려던 차에 날카로운 느낌의 섬찟한 목소리가 들렸다.
”숨는다고 못 찾아낼 거라 생각했다니 어리석구나. 어디에 숨어도 날 피할 수 없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를 받아들이거라.”
”살려주세요!”
다급한 홍심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법주 스님 어디 계세요. 도와주세요.’
”소용없다. 나를 위해 몸을 바치거라.”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법주 스님. 살려주세요. 결국 악귀가 나타났어요.”
”기다려라 홍심아. 사악한 기운이 온 산을 휘감는 거 같구나.”
”네깟 놈이 나를 어쩔 수 있을 거 같으냐? 법력이 제법 있나 본데 날 막을 순 없을 게다.”
하지만 김시헌도 느꼈다. 보통 중하고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법주 스님은 필사적으로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오래된 염주와 한 손에는 유리로 된 작은 호리병을 들고 있다.
”옴 이베이베 이야 마하 시리예 사바하”
”소용없는 짓이다! 멈춰라.”
”타다타 옴 아나레 아나레 비사다 비사다 바이라바지라타레 반다반다 반다네반다네 바이라바 지라파네 파트 훔 브룸 파트 스바하 나무 스타타가타야 수가타야 아르하테 삼먁삼붇다야 사단투 반트라 파다 스바하”
법주 스님은 주문을 외우며 점차 퇴마 의식에 빠져들었다. 주문을 외우는 스님의 머리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나맣 사르바 타타가타남 옴 비푸라 가르베 마니프라베 타나가타 니다르 사네 마니마니 스프라베 비마레사가라 감비레 후훔 즈바라 즈바라 붓다 비로키테 구햐디 스티바 가르베 스바하!”
눈을 번쩍 치켜뜬 법주 스님은 염주를 악귀에게 던지고 호리병 뚜껑을 열어 주위에 물을 뿌렸다.
”뭔 짓을 한 게냐!”
괴로운 듯 김시헌은 날카로운 비명을 연신 질러댔다.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에 홍심은 귀청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아 황급히 틀어막았다.
”결계? 이까짓 걸로 나를 묶어둘 수 없다.”
필사적인 몸부림 끝에 김시헌이 결계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타다타 옴 아나레 아나레 비사다 비사다 바이라바지라타레 반다반다 반다네반다네 바이라바 지라파네 파트 훔 브룸 파트 스바하 나무 스타타가타야 수가타야 아르하테 삼먁삼붇다야 사단투 반트라 파다 스바하 옴 아모카 미로자나 마하모나라 마니바나마 마바라바라 말다야 훔”
법주 스님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오히려 주문의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이번엔 호리병 째 김시헌에게 던졌다. 호리병이 깨지면서 흩어진 물을 정통으로 맞은 김시헌은 괴로워했다.
”평범한 물이 아니구나. 죽여주마.”
”홍심아! 법당 안 부처님 상 뒤쪽에 호리병이 있을 거다. 빨리 가져다주려무나.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네! 스님.”
법주 스님이 김시헌을 막는 동안 홍심은 날듯이 밖으로 뛰쳐나와 법당으로 들어갔다. 스님이 알려준 대로 호리병을 찾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준비를 많이 했구나.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영혼의 힘을 쥐어짜 내듯 김시헌은 강한 몸부림과 함께 염주를 튕겨냈다. 그와 동시에 법주 스님의 몸도 벽에 날아가 강하게 부딪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님!”
바닥에 떨어진 법주 스님은 한쪽 팔이 부러졌는지 반대 손으로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입으로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호리병은 가져왔니?”
”잘못했어요. 저 때문에 스님까지..”
”괜찮다. 울지 마라 홍심아. 그나저나 생각보다 강한 악귀로구나.”
법주 스님의 저항 그리고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를 호리병을 본 김시헌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다음번에 만난다면 중 네 녀석부터 죽일 테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김시헌은 눈을 부릅뜨고 법주 스님을 한참 노려봤다.
”아악!”
법주 스님의 귀 한쪽이 타들어갔다.
”표식을 남겼으니 날 벗어날 수 없을 게다.”
그리고 김시헌은 홀연히 사라졌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주변이 잠잠해졌다. 훌쩍거리는 홍심의 울음소리만 적막함을 없애고 있다.
”미안하구나 홍심아. 내가 늙어서 힘이 약해졌나 보다 허허.”
”아니에요 스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다친 것뿐이란다.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러느냐. 날 좀 부축해서 일으켜다오. 팔이 부러진 거 같구나.”
홍심은 법주 스님을 부축해 벽에 몸을 기대게 만들었다. 많은 힘을 쏟았는지 법주 스님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다음번에 악귀를 다시 만난다면 나 혼자 널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번이 신내림을 피한지 두 번째니 홍심아?”
”네 맞아요.”
”한 번만 신내림을 더 피한다면 더 이상 악귀가 네 몸을 강탈하진 못할 게다.”
”신내림을 피할 수 있나요?”
”아마도 그럴 게다. 대신 악귀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구나.“
잠깐 멈칫한 법주 스님은 말을 이어가기로 한다.
”만약 홍심이 네가 살게 된다면 이 늙은 스님이 부탁하는 거 지켜줄 수 있겠니?”
”그럼요 스님.”
부러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는 홍심의 마음은 참담했다. 어린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절망적이었다.
”사실 난 너를 나처럼 살라고 하고 싶진 않구나. 하지만 악귀를 본 이상 나도 맘 편히 눈을 감지는 못하겠구나. 악귀가 무고한 사람을 헤치고 다닐 걸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단다. 그간 내가 수련했던 불경과 퇴마에 관한 서를 넘겨줄 터이니 부디 악귀로부터 사람을 구하는 인생을 살아주려무나. 어쩌면 너무나 가혹한 부탁이 되겠구나.”
”꼭 그리하겠습니다 스님.”
”그리고 최대한 빨리 월선에게 알려야겠다. 날이 밝으면 마을로 내려가 내가 알려주는 이를 데려와 주려무나.”
”치료부터 받으셔야죠.”
”휴. 그렇지. 이 정도로도 다치다니. 예전 같지 않구나. 이따 날이 밝는 대로 마을에 가서 너무 상세하지 않게 다만 내가 다쳐서 도움이 필요하다 정도로만 얘기를 해주렴. 알겠지?”
법주 스님은 편히 얘기를 하려 하나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 표정까지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어느새 홍심의 눈물도 그쳤고 스님이 부탁한 말을 속으로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