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시간 16
사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성격이 못 돼먹은 걸까?
맨날 분노하고 풀어지고 후회하고의 반복.
40대가 되었건만 여전히 인격수양의 길은 멀었다.
항상 감정을 터트리고 나서야 후회하는 버릇을 고칠 수는 있긴 한 걸까?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어."
회사를 다닐 때는 최소 근무 시간인 8시간 이상을 타인과 섞여 지낸 탓에 몰랐나 보다.
본모습을 보이기보단 가면 속에 감춰진 대로 연극을 했으니까.
어쩌다 가면 뒤의 모습이 드러날 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으나, 그래도 조절이란 게 가능했다.
'어차피 일로 맺어진 사이잖아?'
일을 떠나 불필요한 감정을 섞거나 드러내는 게 오히려 민폐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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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8시간 이상의 완충 장치 역할을 해주던(한때는 스트레스였지만) 회사가 지워지고 나니, 본격적으로 가면을 쓰지 않은 본모습이 드러날 때가 많아졌다.
그런 나의 모습을 일선에서 마주하는 우리 가족은 무슨 죄란 말인가. 프로기복러인 내 눈치만 슬금슬금 보는 가족에게 너무나도 미안할 따름이다.
모름지기 글이라 하면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고 있어 보이는 면을 부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SNS만 해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굳이 못나고 모난 부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내게 있어 글쓰기라는 행동은 SNS와 동일한 보여주기에 가까웠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남보다 특별해 보이는 모습을 써보자.'
'최대한 장점 위주로 써야 해.'
'부끄러운 모습을 굳이 써야 하는 이유라도?'
그런 내게 아내는 말했다.
"속 빈 강정이야."
마음이 비어버린 허해진 공간을 타인으로부터 채우고 싶었다.
'내가 그래도 한때는 괜찮았는데 말이야.'
'이러고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간 해온 게 있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단하지도 않았던 왕년을 추억할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살았던 것도 아닌 주제에 말이지.
SNS도 글쓰기도 점점 심로(心勞)해지고 멸의(滅意)가 생겼으며 매사가 공허(空虛)해지더니, 결국 권태(倦怠)가 찾아왔다.
한 마디로 보여줄 게 바닥났다는 뜻이다.
바닥을 드러내다.
'내 깊이라는 것도 고작 이 정도가 끝이었나.'
파도파도 끝없이 내려갈 수 있는 심연 같은 무언가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예상보다도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특별하리라 생각했던 나에 대한 생각 또한 그러길 꿈꾸던 평범한 사람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었구나.'
'글을 쓰는 내 모습이 특별해 보이길 바라던 욕심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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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모든 게 혐오스러웠다. 염증이 나는 것이었다.
무엇을 쓴다 해도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쓴다는 게 변화를 가져오는 행위는 맞는 것인가?
분명 쓰다 보면 특별해지리라 생각했었는데, 별로 달라진 점이 없지 않은가?
의구심이 생겼다.
씀으로 인해 삶이 달라졌다던 사람들은 거짓을 고했단 말인가?
들려올 리 없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한동안 자문자답을 불평처럼 늘어놓았다.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내 버린 것이다.
불필요한 감정, 쓸데없는 과시욕, 평생의 가보처럼 여기던 사회적인 가면들.
모두를 한 순간에 잠시 던져놓았다.
어차피 지금의 나를 알 수 없는, 알 이유가 없을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 또한 내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민하고 걱정하던 수많은 이유가 사실은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들로부터 발생한 까닭이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된 것이다.
'나이를 X구멍으로 먹었구나.'
오늘은 아내의 외할머니상이 있는 날이다.
가기 전부터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불같이 화를 냈다.
"맞는 옷이 없잖아!"
"애들을 데려가서 계속 장례식 장에 둘 수도 없고."
"숙소를 구해야겠어."
"난 나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고인이 되신 할머니가 손녀의 모습을 보신다면 무어라 대답하실까.
'나의 죽음이 너희 가정의 슬픔이 되길 원하지는 않았단다 얘야.'
맞는 옷이 없는 이유는 내가 자기 관리를 못한 탓이요.
애들을 데려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탓할 시간에 어떻게 보살피는 게 좋을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며.
숙소는 거리가 어떻든 구하면 되는 문제이니 문제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나의 수고로움을 굳이 아내에게 티 낼 필요 또한 없음이라.
모든 불만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단지 화를 내고 싶은 건수를 찾는 것뿐이었다.
이 또한 본질을 벗어나 보여주기에 특화된 내 문제점이 다시 한번 드러난 것일 뿐이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부디 더 이상 화내지 말고, 묵묵히 할머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 드리는 것.
더 이상 아내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 않는 것.
다소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오늘 하루는 티 내려 하지 말 것.
잘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바람을 담아 오늘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