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는 얘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랜드점빵 Nov 12. 2021

마침표(.) 같은 비

술을 마시기 위한 온갖 핑계에 부쳐

비를 기점으로 날씨는 갑자기 더워지기도 하고, 느닷없이 추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비는 한 계절의 마침표(.)와 같은 의미가 된다.


며칠 전에도 그런 비가 내렸다. <가을>이라는 계절에 마침표를 찍는 비였다. 겨울을 향해 어서 오라 다그치는 듯 하루 종일 제법 세차게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어느새 다 그치고 날이 갠 오후. 이제 겨울이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사계절의 시간적 순서에 관한 우리의 (고정) 관념 아래에서 겨울은 언제나 마지막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의 이름을 읽으며 종종 <끝>을 떠올린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겨울이야? 벌써 한 해가 다 갔구나. 그럼 나는 또 나이를 한 살 더 먹겠네?. 아 그럼 내가 내년에 마흔... 이런 제길."


괜히 혼자 울컥해지려는 찰나, 아내가 오늘 이후의 이번 주 내 일정에 대해 물었다. 장모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을 잡아둔 날이었는데, 날씨가 궂어 움직이려면 위험할 것 같으니 일정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장모님의 연락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이번 주에 예정된 저녁 약속이 두 개라, 다음 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대답하고는 베란다로 나가 벌써 겨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은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우리 오늘 <맛고을>에 삼겹살 먹으러 가자."


그때, 거실에서 장모님과 문자를 주고받던 아내의 무심한 듯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종 이런 순간이 닥칠 때면 나는 깜짝 놀라곤 한다. 마침 나도, '이렇게 된 마당에 <맛고을>표 냉동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 하자고 물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계절과 헤어진 날 술 한잔 정도는 하는 것이 낭만적인 삶의 실천임을 아는 아내와 함께라니 참으로 행복하지 아니한가, 그런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냉동 삼겹살을 굽고 소주잔을 채웠다.


다만 냉동 삼겹살과 소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우리의 대화는 '세상에 뿌려진 어떤 낭만들'이나 '가는 세월의 쓸쓸함에 부쳐' 같은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이제 내일부터는 진짜 고민하지 말고 그냥 겨울 옷 입자.'

'올 겨울에는 보드 타러 몇 번이나 갈까?'

'겨울에 어디로 여행 가면 좋으려나.'


대부분 다시 돌아온 겨울을 어떻게 보낼지에 관한 것이었다.


<맛고을>에서 나와 2차를 가기 위해 좌광천 산책로를 걸으며 나는 얼마 전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황교익)>에서 읽은 마침표(.)에 관한 글을 떠올렸다. 마침표는 말 그대로 문장을 끝맺음하는 종지부이기도 하지만 문장과 문장 간의 구획을 표시해 주는 역할도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린 비는 가을의 종지부이기도 하지만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의 경계를 나누어 주는 의미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쌀쌀한 바람을 쓸쓸한 기분으로 괜히 바꿔 앓으며 신음했던 것은 그저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방금 전까지 지나간 가을을 곱씹는 소회가 아니라 다시 만난 겨울을 향한 기대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냉동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브랜드점빵-







매거진의 이전글 삼 일간의 연휴, 두 번의 집들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