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과 설기현이 뛰던 2000년대 중반부터 리버풀을 응원했다. 당시에는 밀란 바로스와 스미체르, 지브릴 시세, 해리 키엘, 하만, 히피아 등이 주축이었다.(제라드는 그때도 있었다.) 리버풀을 응원했던 지난 15년간 (2018-2019 시즌까지) 그들은 프리미어리그에서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때문에 수차례 리빌딩이 이루어졌다. 기억에 남는 공격수만 떠올려 봐도, 장신의 피터 크라우치부터 페르난도 토레스, 앤디 캐롤, 스터리지, 수아레즈 등 수없이 많다. 보살처럼 15년간을 응원한 끝에, 드디어 Liverpool 경기를 직접 볼 기회가 생겼다.
마음 같아서는 리버풀에 가서 홈 개막전을 보고 싶었는데, 그 경기는 티켓이 너무 비쌌다. 사실 싼 티켓은 이미 서포터들에게 모두 판매가 되어서 값비싼 라운지 티켓(음식과 맥주가 기본 제공되고, Half time에는 팀의 레전드 들과 경기에 대해 이야기도 할 수 있는 티켓)만 남아 있었다. 기억에 60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왕복 기차비와 숙박비를 포함하면 1인에 100만 원 이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리버풀에 가는 것은 포기했다. 사실 그것밖에 대안이 없었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라도 선택을 했을 거다. 하지만, 나에게는 플랜 B가 있었다.
바로 시즌 2번째 경기인 사우스햄튼 원정 경기였다. 사실 사우스햄튼 홈 개막전이어서 서포터들(팀의 유료회원들)만 구매할 수 있는 경기였는데, 사우스햄튼에 사는 친구 동생(지인 찬스 제대로 썼다.)이 서포터여서 티켓을 구해줬다.
앞에서 4번째 줄(D 열)이었고, 가격은 65파운드(약 10만 원 정도, 그 경기의 티켓 가격은 35~65파운드까지였음.)였다. 티켓 재판매 사이트인 스텁허브에서 파는 티켓은 최저 20만 원이 넘었으니,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
경기장 근처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경찰들이 도처에 깔렸다.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가는 경기장까지 무사히 걸어가기 힘들 것 같았다. 8월 중순이라 태양이 뜨겁기도 했지만, 흔들리는 나의 동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는 선글라스가 필수였다. 줄을 서서 경기장에 들어가는데, 누군가 나의 등을 툭 쳤다. 고개를 돌렸더니 백인 할아버지 한 분이 엄지를 치켜들고 "요시다?"라고 말했다. 아마 일본에서 온 요시다 선수의 팬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때부터 일본인 연기를 시작했다.
경기장에 들어가 보니, 우리 자리는 사우스햄튼 응원석의 한가운데였다. 원정팀인 리버풀을 위한 자리는 아주 좁은 구역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좁은 구역은 철제 펜스로 둘러져, 일촉 즉발의 상황을 방지하고 있었다. 경기 중에 아무 일도 없었는데, 펜스 자체가 공포를 불러왔다. 리버풀의 골에 절대 환호하지 않기로 처음부터 친구 L과 다짐을 했다. 치열했던 전반전 내내, 사우스햄튼의 공격 찬스 때 환호했고, 리버풀의 공격 때는 야유를 퍼부었다. 그런데, 본심을 숨기기는 정말 어려웠다.
전반 종료 직전, 사디오 마네의 골이 터졌다. 나와 친구 모두 두 손을 치켜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약속이나 한 듯 두 명 모두 올렸던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고, 아쉬운 척을 하며 탄성을 질렀다. 사실 친구는 마네가 득점을 한다는 데 2파운드를 걸었기 때문에, 나보다 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반전이 0:0으로 끝나는 데에 2파운드를 걸었는데, 겨우 3000원(2 파운드)이 내 환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0번 마네가 돌파 시도중
마네의 슈팅, 이 슈팅이 첫 골이 되었다.
후반전에는 전반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더 노련하게 연기를 했다. 피르미누의 추가골이 나왔을 때 절망했고, 사우스 햄튼의 골잡이 대니 잉스가 만회골을 넣었을 때 미친 듯이 환호했다. 연기를 하다 보니, 정말 사우스햄튼을 응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지만, 경기는 2:1로 승리했고, 리버풀 팬은 아니었던 친구 L은 2파운드를 땄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하프타임 때 찍었던 셀카를 보았는데 뒷자리에 앉았던 아저씨의 눈빛이 너무 날카로웠다. 아마, 우리의 정체를 알아챈 것 같다. 무사히 경기를 관람하고 나올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2019-2020 시즌 리버풀은 프리미어리그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하며 한을 풀었다. 내가 사우스햄튼까지 가서 위장 응원을 한 덕은 아닐까ㅋㅋㅋ?
코로나가 끝나고, 프리미어리그를 보러 가실 계획이라면 꼭 홈구장에 가서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원정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가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