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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Apr 04. 2020

작은 지식을 큰 가치로 바꾸는 법

상대방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면 가능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술인지 물인지 헷갈리는 말을 만날 때가 있다. 나는 '가치를 올리다'란 표현을 들었을 때 그랬다.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을 해체해보면, 본래 그냥 버려지거나 방치될 수 있는 디지털 제품을 재생산해 판매하여 회사가 돈도 벌고 자원순환을 통한 환경 보전도 한다는 말이다. 설명을 듣고 나면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된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럴싸한 포장 같다. 마치 상대방에게 이점이 있는 듯 쓰였지만 자기중심적인 내용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만 유리한 점을 가치란 단어로 미화하면 결국 제 몫만 챙기기 바쁜 관계로 전락하지 않을까.


내가 4년여 일했던 중고 제품 거래시장에서는 이런 일이 더러 있었다. 새 상품이 아닐 뿐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대다수라 여느 장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헌 제품을 거래하다 보니 사는 사람 입장에서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량으로 거래하는 업자는 이런 점을 감안해 물건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일정 기간 불량품을 교환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업자끼리 거래할 때 품질기준이 서로 다르니 일단 물건을 넘겨버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상대방이 문제 삼지 않으면 넘어가는 식이다. 이런 류의 가치보다 함께 더 좋아질 방법을 찾고 싶었다.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일을 하면서 작은 실마리를 찾았다. 하루는 회사 제품을 산 고객이 전화했다. 동봉된 매뉴얼이 너무 어렵다고 했다. 매뉴얼은 기성 전자제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서다. 제품 정보와 사용법이 들어있다. 쉽고 친절하게 알려드린다는 생각으로 시간 들여 편집했었는데 생소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사실 그분 외에는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대화를 좀 나눠보니 한 마디로 기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분이셨다. 이를테면 선을 어디에 연결하라는 말보다는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까지 알려드려야 이해하는 수준이셨다.


이 순간이 진짜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순간임을 오랜 뒤에 알게 됐다. 당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이런 것까지 다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때가 일종의 고비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길을 오르는 이가 언덕 끝을 앞두고 숨을 크게 몰아쉬듯, 평소 생각하던 가치의 본질을 만날 시간이 온 것이다. 나는 전화로 세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손에 잡아야 하는 선의 모양과 굵기는 무엇이고, 어떤 순서로 어디에 연결해야 하는지 그림 그리듯 말씀드렸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분은 매뉴얼 없이 전화를 따라 모든 설치를 마쳤다.


우연한 기회에 나도 상대방도 모두 좋은 결과를 얻는 일을 했다. 조금 귀찮을 수 있었지만 자세하게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 매뉴얼을 어떤 식으로 바꿔야 할지 알게 됐다. 당연히 그 분과의 만남 이후 설명서를 많이 바꿨다. 그 고객님은 설명해줘서 너무 고맙다며 이후 동네 친구 몇 분이 회사 제품을 사도록 주선하셨다. 게다가 내게 들은 설명을 친구들에게 직접 해주시며 현장기사 역할도 해주셨다. 그분 말처럼 직원이 친절해 되갚는다고 표현하기에는 과분한 반응이었다. 내 딴에는 별 내용이 아니었는데 그분께는 그렇게 하실 만큼 꼭 필요했던 듯싶다.


내게 작아 보이는 지식도 상대방에게 의미가 있다면 가치가 있었다. 이 체감은 여운이 오래갔다. 돌아보면 나는 당시 설명이 그분께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짐작도 못했던 것 같다. 그분과의 대화를 돌이켜 보건대 '너 같은 사람은 생전 처음 만났다' 수준의 반응이셔서 몸 둘 바를 몰라했었다. 이때보다 지금 좀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함께 좋을 수 있는 진짜 가치를 더 자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게 좋을 일을 의도하거나 미리 예상하긴 어렵겠지만 내가 조금만 더 수고하면 되는 정도라면 기꺼이 해볼 만하겠다.    


자신만 아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조금만 더 수고해보세요
함께 좋을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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