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가 내 마음처럼 안 바뀐다 느낄 때
이따금 사랑의 콩깍지를 회상한다. 대학생 시절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추운 겨울 저녁 자전거를 탔다. 버스가 끊긴 늦은 밤에 인적이 드문 거리와 구릉으로 된 공원을 지나 그녀의 집 앞에서 잠깐씩 만났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뭐가 그리 다급했나 모르겠다. 밤늦게 전화를 한 것도 모자라 제 발로 추위를 뚫고 갔으니 고생은 당연한 일이었다. 입과 얼굴이 어는 것은 물론 손이 부르튼 경우도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문득 일상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아내와 이 때를 추억한다. 서로 기억하는 부분이 달라 재미있다.
아내는 지금보다 말이 없었다.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다. 좋아하는 감정이 생길 때 표정만 드러나고 말수가 없어지는 사람이다. 반면 나는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가 좋으면 어떻게 왜 무엇이 좋은지, 또 지금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말하길 좋아한다. 내 말이나 행동에 이런저런 반응을 해주면 좋겠는데, 별 말이 없으니 답답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생각해?'라고 물으면 '아무 생각 안 해'라고 하는 식이었다. 그냥 옆에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별 생각이 없었다고 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마저도 이렇게 설명을 해주니 알게 됐다.
한 번은 이런 주제로 꽤 진지하게 대화했다. 나는 아내가 본인이 생각한 것을 말해주고 반응해주는 것이 좋고 그래야 감정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며 밑줄 긋고 형광펜을 칠해야 할 부분을 짚어줬다. 아내는 알겠다고 말하면서도 그게 잘 안된다고 얼버무렸다. 함께 있을 때 즐겁고 좋은 감정이 있는데 그것을 일일이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느낄 수 없어 갑갑했다. 어쨌든 더 따지거나 가르칠 일은 아니어서 그렇게 넘어갔다. 그런데 꼭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결혼하고 지내다 보니 아내가 좀 달라졌다. 이전보다 표현이 늘었다. 아내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맥락과 감정을 매우 자세하게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관계의 맥을 읽을 줄 알았고 상대가 말하지 않은 내면을 잘 추론했다. 그것은 더듬이라 부를 만큼 예민했는데 세상을 보는 시각에 있어 나와 가장 다른 부분이었다. 내가 어떤 장면을 시각과 인상으로 본다면, 아내는 그 상화을 인물의 관계와 감정선으로 기억했다. 특히 장모님과 처제와 있을 때 말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공통의 관심사가 있을 때 아내는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표현했다.
이 즈음 알게 되니 아내에게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본인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해주면 좋겠다고 종종 말했는데, 상대에게 애정을 느끼거나 감사한 일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아쉽고 힘든 상황이 있을 때만 대화가 길어지니 오래 전 아내에게 들었던 따뜻하고 좋은 표현이 많이 기억나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아내는 정이 많고 배려심이 남다르다. 그런 것들이 내게도 느껴지도록 바뀌면 좋겠는데 잘 안됐다. 불현듯 나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콩깍지에 씌었던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원하는 상대방의 모습이 있지만 정작 아내에게 그에 걸맞게 행동했나 생각해보게 됐다. 그 당시의 나는 다정다감했다. 두 손으로 작은 새를 품듯 여자 친구의 마음이 어떨까 조심조심 말하고 반응했다. 그랬던 내가 어느새 좀 거칠어졌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지만 삶의 숙제들을 풀며 지친 마음에 내 표현이 변했다. 맛있는 음식을 단둘이 먹으며 웃고 떠든 기억이 드문드문하다. 종종 지치고 여유 없다고 느꼈던 만큼 잠깐 멈춰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아내를 주목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오늘은 내가 먼저 아내에게 데이트하자고 할까 보다.
아내가 변했어요.
제가 변하기 시작하면서부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