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아내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낄 때
종종 아내와 다툰다. 이는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대개 마음속은 그보다 험악했다.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면 내가 잘했나 네가 잘했나를 겨루게 된다. 내 기준에서 볼 때는 아내가 먼저 포성을 울렸다. 나의 행동을 조목조목 따지며 본인의 행동과 비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를 비난한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신혼 초에는 이럴 때 나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내가 그렇게 잘못하지는 않았다는 식으로 따졌다. 그러다 최근 몇 년간은 또 그러는구나 싶은 마음에 외면하기까지 했다. 굳이 부딪히는 것이 내게 도움되지 않아서다. 나는 못내 억울했다.
아내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 만큼 하고 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긴 탓이다. 실제로 가정에 쓰는 시간이 많았다. 주중에는 저녁 회식이 거의 없고 정시 퇴근할 수 있는 회사를 다니며 재빨리 가정에 복귀했다. 주말에도 되도록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처가 근처에 살며 가족 행사도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여러 친척과 원만하게 지냈다. 이 정도면 다른 남자보다 못하는 것은 없다고 내심 자신했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부터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일찍부터 헌신했다는 부채 의식도 여기에 한몫했다.
그러니 아내의 말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았다. 아내는 화를 낼 때 힘들었던 옛 시절을 이따금 소환했다. 남편이 적은 월급을 가져다줘 빠듯하게 살며 아이를 키웠던 시기, 둘째 아이가 갓 나왔을 때 남편이 퇴사 후 이직을 준비하느라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 나의 공격적인 반응에 상처 받았던 순간 등 본인이 받은 고통을 회상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또 비방한다'라고 받아들였다. 내가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니 지금도 따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도 기분이 상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지겹다고 말할 때 나도 마찬가지라고 되받아쳤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그런 갈등이 있을 때를 돌아보면 그녀를 나름의 관점이 있는 한 명의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저 문제를 갖고 있는 대상으로 단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내 관점에 함몰된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문제 투성이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식으로만 바라본 것이다. 내가 남편이자 아빠로서 해 온 일에 대해 스스로 대견하여 호평한 나머지, 내 관점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내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실이 어떨까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잠깐만 그 방향에서 바라보면 그녀의 현실이 충분히 힘들고 불평할 만했다.
나도 모르게 아내의 관점을 무시하고 있었다. 내가 한 일만 공로로 여기며 자존감의 성을 쌓아 올린 탓이다. 물론 없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편향되면 역효과가 났다. 결국 관계 속에서 내 진짜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아내보다 내가 더 옳게 잘 살고 있다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진짜 공감하지 않은 채 상황을 봉합하고자 일단 사과했던 모습이 대표적이다. 왜 잘못인지 모르면서 일단 미안하다고 말하며 빨리 마무리짓고 싶었다. 말과 행동에 진심이 없으니 당연히 문제는 더 꼬였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방어했던 논리를 버리기로 했다. 그러자 아내의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 도움이 필요했다. 아내는 인생의 적지 않은 부분을 함께 해준 동반자이자 친구였다. 그녀에게도 본인의 인생과 자아가 필요했다. 부부로 함께 살며 문제가 닥칠 때, 나와 똑같이 부담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헤쳐나갈 동료였다. 그녀의 모자란 점을 다른 누가 아닌 내가 채워주고 싶어 졌다. 이 깨달음을 아빈저연구소가 지은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이란 책을 읽으며 얻었다. 머릿속에 지은 성을 깨고 싶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아내의 관점으로 아내를 볼 때
정말 무엇이 필요한 사람인지
가슴으로 알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