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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Jun 05. 2020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는 방법

너무 재촉하지 말아 주세요

일을 할 때 성격이 나온다. 나는 남보다 적응이 빠른 편이라 새로운 일을 맡아도 곧잘 해냈다. 소위 '일머리'가 있어서 몇 번 해보면 대략 어떻게 해야 할지 금방 감을 잡는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나름대로 프로세스를 만들거나 계획을 세워 개선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니 남들 눈에는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다. 재빠르게 일을 해치우고 자발적으로 다음 일을 찾아가는 사람을 싫어하는 회사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속도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은 종종 있었다. 조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가길 원하는 분이었다.


일하는 스타일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당시 사회초년생 시절이었는데, 그 사람과 이야기하면 일하는 맛이 뚝 떨어졌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지' 대화해보면 아직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렇다고 노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일을 이해하고 확신이 든 후 행동하는 방식이라 일단 부딪혀 배우고 개선해가는 나와 뭔가 안 맞았다. 초반에는 속도를 맞춰 보고자 재촉했는데, 나중에는 그분의 속도에 맞추는 쪽으로 적응했다. 이것이 옳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능력이 제한된 것 같은 아쉬움이 못내 있었다.


이 와중에 새로운 부서장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았던 이 분은 예산이 몇십 억 되는 사업도 짜임새 있게 운영할 만큼 실력자였다. 업무에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속도감 있게 일하는 모습에 첫인상이 좋았다. 그런데 막상 이분의 스타일에 맞춰가려니 시작부터 삐걱댔다. 혼자 한껏 계획을 고민하신 후 일정 분량을 떼어주시면서 목표 달성에 대한 논의를 하는데 뭔가 답답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듣지 않은 채 당신의 계획에 필요한 블록을 만들고 맞추듯 대화하는 것이 숨 막히게 느껴졌다.


본인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그분의 관점과 자주 충돌했다. 논리의 뼈대는 경험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시야에서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타인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자신의 경력을 거론하며 따르라고만 하니 젊은 사람 같지 않았다. 성과와 능력이 대단하게 보임에도 그분의 말과 행동에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소통의 느낌에 반발심만 쌓여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에 대한 평판이 내 느낌과 비슷했다. 늘 혼자 바쁜 것처럼 서두르는 통에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얘기도 들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시간이 흘러 팀장이 된 후 이 분이 종종 떠올랐다. 리더는 확실히 챙기는 것이 많았다. 매출과 비용을 함께 관리하니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팀원보다 나이가 어린 팀장인 덕분에 일방적으로 하지 않으려 노력을 많이 했다. 특히 각자의 분야에서 쌓아온 소양을 현재 업무에 적용하기 위해 논의하려 애썼다. 하지만 늘 부족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이 익숙해질수록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이 많아진 탓이다. 함께 하는 분들의 의견을 듣고 고민해 반영할 만큼 여유가 없던 것은 군말 만들지 않을 만큼 탁월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만약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했다면 어땠을까 그려본다. 팀장이 히어로가 아닌데 팀을 구하고 더 나아지게 만든다고 혼자 동분서주했던 순간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모든 것을 협의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내 결론이 답이 아닐 수 있다고 여기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리더십이라 정당성을 부여했던 행동은 사실 팀원에게 결정사항을 따라달라고 졸랐던 것이었다. 내 의견과 방식만 갖고는 일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좀 기다려주며 함께 걸어가는 관계가 더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탁월하고 멋지고 흠없이
일하려는 욕심을 조금만 버려도
제 생각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기더군요
좀 느려도 괜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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