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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너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걸까

by 글쓰는곰돌이

진정으로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을

계속하여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차츰차츰 더 많은 빛을 얻을 것이고

더 강해질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

가수 서자영의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과 함께 읽어주시길 권합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mtiagJppTyY

처음은 아는 후배 A를 통해서였다. A는 성격도 비슷했고, 정이 많이 가는 동생이라 종종 점심을 함께했다. 그날도 A와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는 날이었는데, A의 또 다른 친구도 마침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 뒤로 셋이서 밥을 한두 번 정도 더 먹었다가, 학과 대학 축구경기를 보러 간 자리에서 또 만나게 되었다. 익숙한 얼굴이 반갑기는 했지만,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경기장만 바라보았다. A가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났는데, 나와 그녀가 박박 우겨서 A와 함께 자리를 뜰 정도로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 이 거의 지날 무렵에, A와 그녀에게 신세를 지게 된 일이 있었다. 감사 인사도 할 겸 상금으로 술을 한 잔 사기로 했는데, 그녀는 갑자기 누가 더 술을 잘 마시는지 붙어 보자고 했다. 학과 대면식 자리에서 취하는 모습을 봤는데, 아주 만만하다며 이겨 주겠다는 것이었다. 의기양양한 모습에 오기가 생겼던 나와 그녀, 그리고 희생자가 된 후배 A는 같은 술잔으로 승부를 시작했다. 술잔이 돌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이 벌개졌고 목소리도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취한 사람은 엉뚱한 후배 A였다. 얼굴이 벌겋게 돼서 실실거리는 A의 웃음소리에 우리도 마주 보고 웃었다. 잔뜩 취한 A를 기숙사에 돌려보낸 뒤에, 우리는 결판을 내기 위해 근처 술집까지 30분여를 함께 걸었다. 밤바람이 선선했고, 막 떨어지기 시작한 벚꽃 내음이 가로수 길에 짙게 배어 있었다. 알딸딸하게 취해 있었던 우리는 봄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함께 걸었다.

lawkang_353564_1[603670].jpg 캠퍼스의 밤 벚꽃

2차에선 뱃속에서 찰랑거리는 술 냄새가 나서 소주 한 병을 다 비우지도 못했다. 먼 길 나왔는데 시시하게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그 길로 노래방에 들러 몇 곡을 읊다가 함께 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늦은 새벽 길가에는 지나는 차도 없었고, 사람도 없었다. 적당히 취한 두 손이 진자 운동을 하며 조금씩 스쳤다가, 부딪혔다가, 이내 맞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고 언제부터 맞잡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벚꽃이 다 떨어진 늦은 봄이 되도록 스치기만 했던 우연들이 그렇게 인연으로 서로에게 잡히었다.

37304594_538010053345028_2504218185587228672_n.jpg 여름의 푸른 하늘

여름이 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잇는 시험 기간이 조금 길어진다 싶었을 때는 근처 카페로 함께 도망을 나오곤 했다. 답답하고 무더운 도서관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주었다. 유난히 맑았던 여름 하늘은 구름이 한 점도 없었고, 파란 하늘이 동산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 쪽빛으로 물든 강이 반짝였다. 서로 한 잔씩 커피를 시켜 놓고, 해가 저물 때까지 분자생물학이나 생화학 같은 것들을 함께 공부하고 있으면, 힘내라며 손을 꼬옥 잡아주던 따듯한 손이 마냥 좋기만 했다.


더위를 먹었는지, 그녀가 웃으면 나도 바보 같은 웃음이 났다. 잠시 머릿속에 더올리기만 해도 초콜릿을 먹은 것처럼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 하루는 과외를 마치고 돌아오는 밤이었다. 길가에 세워진 조그마한 트럭에서는 순대와 떡볶이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옷깃을 잡아끌며 '저거 먹자!'하고 말하는 웃음소리 섞인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서 순대 1인분, 떡볶이 1인분을 사다가 그녀가 있는 도서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때 함께 먹었던 떡볶이 맛이 시험 문제보다 더 오랫동안 생각이 났다.

image_2457908601518157478597.jpg?type=w1200 시험 문제보다 떡볶이 맛이 더 오랫동안 생각이 났다.

늦가을이면 효자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김을 모락모락 내며 그녀를 기다리던 호떡을 만나기도 했다. 달콤한 꿀 향이 배어든 뜨거운 호떡을 한 아름 가득 품에 넣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기숙사로 가면 그녀는 꽉 끌어안아 쭈글쭈글해진 호떡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렇게 2년을 함께 지나왔다. 엄마는 '나이도 어린 게 생각보다 오래 만나네?'라고 농담 삼아 말씀하시지만, 그녀는 타지에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가족 같았다. 다른 사람과는 깊이 친해지기 어려워하던 나에게 스며든 첫 사람이라 더 소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리에게도 겨울이 왔고, 조금씩 더 추워지면서 나와 당신은 잠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당신이 있는 곳은 추웠고, 하는 일이 고된 지 아프기도 많이 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도 유난히 지쳐 보였다. 길어지는 기다림만큼 이야기는 짧아졌고, 나와 당신을 이어 주던 고리가 하나씩 줄어들면서 서로 조금씩 입을 닫게 되었다. 추운 겨울은 입 안을 바짝바짝 마르게 했고, 기다리는 일도 유독 힘들었다. 따듯한 스웨터처럼 수놓았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지면서 나와 당신 사이도 조금씩 차가워졌다.


그해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추웠던 날, 그녀에게 연락을 받았다. 서로 시간을 갖자는 말이었다. 더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만 거듭하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말만 되뇌었다. 입안에서 네댓 가지 말이 고였다가, 꼴깍 넘어갔다. 고요한 적막이 멀고 깜깜하게 느껴졌고,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이따금 적막을 깰 뿐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그녀가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졌다. 겨우내 한달음에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는데, 추운 겨울에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갈 일이 없게 되었다.

beautiful_empty-bed.jpg 기억들은 겨우내 멈춰버린 시간에 박제되어 있었다.

며칠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나는 도망치듯 전화를 끊었다. 아무 이유 없이 떠나간 그녀를,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바뀌는 것도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알 수 있으면 좋았을 걸. 나는 어찌할 줄을 몰라 그냥 드러누웠다. 올이 풀려 못 입게 된 옛날 스웨터처럼, 멈춰버린 시간에 박제되어 있었다. 추위 핑계를 대고, 겨우내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간밤에 네덜란드에도

눈이 내린다.


사람들 발길 어지럽던

시내도


쒸익 쒸익 열기 내뿜던

자동차도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도

하얀 담요를 덮어주었다.


따듯해서 더 아픈 것들에

차가운 눈물 흘리면서.


hihihi.jpg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지만 끝끝내 떠나갔고,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도 거짓말처럼 다시 벚꽃을 캠퍼스 한가득 드리워 놓았다. 밤이면 흐드러진 벚꽃 아래에는 풋풋한 나무들이 마음을 속삭이고 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가을, 그리고 겨울도 다시 지나게 되겠지. 그렇게 나와 당신의 계절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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