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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뿐인 여행, 진짜 여행

여행은 발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닐까

by 글쓰는곰돌이

모스크바의 여름은 녹록하지 않다. 햇빛이 뜨거운 한낯의 광장에 옷을 훌훌 벗었다가 이내 칼바람에 감기가 걸려 버린다. 지금 내가 그런 꼴이다. 제일 두꺼운 옷을 껴 입고 밤새 끙끙 앓다가, 하룻밤을 꼬박 앓고 나서야 집앞 카페에 기어나와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인 덕에, 이렇게 쓰러져 있어도 되는 건 꽤나 괜찮은 행운이다. 마지막 날까지 모스크바를 조금이라도 더 둘러볼 궁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마침내 자유로워진 셈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람이 북적이는 크렘린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볼쇼이 극장에 발레를 보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족스러운 변명거리가 생겼으니 나는 자유다. 이제서야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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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하고 있을까?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거라면, 어제도 했다. 한국에서도 했다. 모스크바의 슈퍼마켓에서 맥주와 저녁거리를 사는 거라면 본가에서도, 포항의 기숙사에서도 항상 하던 일이다.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걸 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매일 새로운 박물관, 새로운 모험,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할 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모스크바에 온 뒤로 매일이 그런 식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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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후에는 그것도 시큰둥해져 버린다. 모스크바에 온다고 해서 특별히 엄청나게 많은 즐길 거리를 찾을 수 있는건 아니다. 아름다운 야경, 미술관, 박물관을 몇번 더 본다거나, 몇장 더 찍는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러시아 현대미술에 대해서,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와 그 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매료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구글에서 모스크바를 검색해 본다 하더라도 그럴듯한 하루 여행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이런 그림들을 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들여다볼 수 있다. 관광명소 사진들은? 인터넷에 한없이 널려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림을 몇백 장을 본다 해도, 수많은 사진을 찍는다 해도, 아무리 모스크바 곳곳을 돌아다녀 본다 해도 그것이 내가 지금 여행중이라는 것을 입증해주지는 않는다.


대체 '유용하다'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사 이래 모든 인류의 유용성의 총합은 바로 오늘날 이 세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용한 것보다 더 도덕적인 것도 없지 않은가.

- 밀란 쿤데라, [불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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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모스크바 강을 바라본다. 바람이 강물에 부서진다. 손을 뻗어 강물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이건 울퉁불퉁할까, 아니면 차가운 물처럼 축축할까. 나는 그림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현실을 보고 있는 걸까? 그림을 너무 많이 봤더니 이 순간, 잡다한 생각들과 감정으로 헝클어진 풍경이 아무개 씨의 인상파 그림처럼 느껴진다. 제멋대로인 머릿속이 이제는 사르트르를,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을 생각한다. 지금의 내 신세가 마치 로캉탱 같다고 생각한다. 먹고 사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삶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다. 모스크바에 대해서라면 이제 그만 알고 싶고, 그만 떠나고 싶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위장이 부글부글 끓는다. 문득 레닌 도서관에 다시 가고 싶다. <구토>를 펼쳐 놓고, 책 속에 빠져 로캉탱의 일상으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모스크바에 있다. 이런 생각들은 홀로 모스크바에 떨어져 <구토>를 읽는 나 자신이어야만 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선택하지 않은 모든 것이 모두 내 자신이 된다. 버스가 없어 낙담하는 것도 '나'고, 상관하지 않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도 '나'다. 지금 거기를 선택하는 것이 '내 여행'이 되고, 지금 거기 가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도 '내 여행'이 된다. 그 모든 '나'를 단숨에 만나게 되는 건 오직 여행을 떠났을 때 뿐인 것이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


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


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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