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곰돌이 Nov 09. 2018

'인재', '영재'찾는 나라의 국민들은 왜 불행한가

인재란 무엇인가

썩 아쉽지 않게 공부를 한 덕분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종종 '열심히 공부해서 인재가 되거라'하는 말씀을 듣곤 했다. 어른들은 인재가 되라는 말을 나름의 덕담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교장선생님도, 대학에 특강을 오시는 몇몇 교수님들도, 또 새로 부임하신 총장님도 꼭 인재가 되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하시는 걸 보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재가 되라는 말이 덕담이긴 한 건지 의문이다. 대한민국 인재상 선발 시즌을 맞아 최종 면접을 준비하는 지인들과 밤새 연락하다 보니 잠이 다 깨서, 도로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인재란 그 사회의 가치관과 나아갈 방향이 담긴 것이기에, 인재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그 사회와 문화를 담고 있다. 사전적으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학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어떤 일'은 시대에 따라 종종 달라져 왔다. 


그렇다면 한국의 인재상은 그동안 어떻게 제시되어 왔을까? 대한민국 인재상을 살펴보면, 2008년에는 '가난, 가정문제, 장애 등 역경을 극복하고 좋은 업적을 달성한 인재들'이, 2013년에는 '새롭고 융합적인 가치를 창출해 창조경제를 견인하는 인재'가, 2014년에는 '자신의 꿈과 잠재된 끼를 바탕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인재'를, 그리고 오는 2018년에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공동체의식을 갖춘 탁월한 인재'를 선발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4차 산업혁명과 창조경제의 광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오늘날의 인재란, 지금의 사회 시스템으로는 낳을 수 없는 돌연변이다. 획일적이고 경쟁적인 시스템 아래에서 탄생한 사회적 기업가 혹은 야심있는 20대 창업가와 같은 것이다.


인재는 사람인가, 상품인가?

이런 인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인재라는 월계관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인재'란 것은 평가이고, 타인의 가치관과 시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재란 자존감이 높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매년 불가능해 보이는 공무원 시험을 통과해내는 공시생도, 첫사랑과 60년 평생을 사랑하며 살아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노부부도 '인재'라는 평가를 받기엔 한참 부족하다. 


평가받을 만 한 탁월한 성취, 가령 부모를 잃고도 어린 나이에 경시대회에서 수상하고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하는 드라마가 있다거나, 최연소 토플 만점자 같은 타이틀이 있어야 한다(최근 수상자 뉴스를 참고). 다시 말해, 인재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냐를 판단하는 대신 그 '모습'이 얼마나 훌륭해 보이고,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느냐를 판단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사람을 지칭하던 '인재'라는 단어에는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 낸 이미지 파편들만 가득하고,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는 온데 간 데 없다.


21세기 체제선전, 북한인가 남한인가

굳이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본인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 메달을 씌워주고(물론 값을 매길 수 없는 최고의 스펙이긴 하지만), 마치 70-80년대 국가 산업 발전에 봉사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국가의 인재로 임명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국가는 청년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하기 위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체제 선전에 필요한 광고 모델을 수확하고, '국가 인재'들에게는 약간의 상금과 '국가가 보증해 준 인재'라는 품질 보증서가 따라 다닌다


청년(15~29세) 실업률은 1999년 이래 사상 최고, 사실상 실업상태인 체감 실업률은 23%에 이르는 요즘, 4차 산업혁명이라는 추상적인 미래를 추구하는 정책이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선 눈에 보이는 '우상'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난립하는 스타트업 지원정책이 힘을 잃지 않으려면 이런 곳에서도 뛰어난 청년사업가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공시생 규모가 44만명을 넘어섰다는 뉴스를 듣는다. 2020년 고교 졸업자 수가 50만명 정도라고 하니, 그 규모가 얼추 짐작이 간다. 미래 없는 직장생활에 지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두어 번 쯤 실패하고 뒤돌아 보면 이십 대 후반이더라는 이야기가 20대에게는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1년, 2년 취업 준비하는 과정이 으레 그래야 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누군가는 오늘날의 '공시 낭인'들을 보며 요즘 것들은 도전할 줄 모르고, 안주하려고만 한다고 말할 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적응하며,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이 사회다. '공시 낭인'이 많은 사회는 그렇게 해서라도 공무원이 되는 게 기댓값이 가장 높은 합리적 선택인 사회다. 


 이제 흙 속의 진주는 그만 찾고, 그 흙에서 고구마, 인삼이라도 남부럽지 않게 키우는 시스템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논에서는 여름 내 모종이 시들어 가는데 농부는 진주만 찾고 있는 듯 하다.



좋은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국가에는 광고모델이 필요하지 않다. 길을 지나는 대학생을 아무나 붙잡고 물으면 그의 표정에서 알 수 있으니까. 이제 '대한민국 인재상' 대신, 사람이 존중받으며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미래상(未來像)을 제시할 때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유주의자의 민족주의: 네덜란드의 무슬림 차별정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