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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곰돌이 Nov 23. 2018

네덜란드의 신호등은 2.5배 많다

차보다 사람이 먼저인 교통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독일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친구들이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깜짝 놀라는 점이 3가지 있다. 


'맛없는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네덜란드 문화, 자전거 전용 주차장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자전거들, 그리고 아침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과 텅텅 비어있는 버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만큼 네덜란드의 생활양식에서 자전거가 차지하는 부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네덜란드와 가장 기다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데다 언어도 비슷하고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비율도 한국보다는 높은 편이지만, 그런 독일에서조차 이렇게 많은 자전거를 길거리에서 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자전거 주차장 풍경. 어떤 이는 '징그럽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네덜란드의 맛없는 감자야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전통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오죽하면 감자튀김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민족이 홀란드 인이다.), 주차장마다 빼곡히 들어찰 정도로 자전거가 많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생활양식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네덜란드만의 독특한 '교통 시스템'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네덜란드의 특이한 교통시스템은 '신호등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가 하면, 한 건널목에 보통 6개의 신호등이 운용되고 있을 정도다. 그 수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실제 운용방식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 6개의 신호등 가운데 2개가 '자전거 전용도로'에 해당되는 자전거 신호등이고, 4개가 보행자 신호등이다. 이 자전거 전용신호는 보행자 신호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만 켜지지만, 건너려는 자전거가 있을 경우에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아주 짧다. 예를 들어, 아래의 그림을 살펴볼 수 있다.


(좌) 실제 네덜란드 도로에서 자전거 신호만 켜진 상황.                (우) 이 상황에서 실재하는 신호의 상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


이 경우, 보행자 신호는 빨간 불이고, 자동차 신호도 빨간 불이지만 자전거 신호만 파란 불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호 지속시간이 짧아 자동차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짧고, 자전거도 쉽게 건널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고 실용적이다. 재미있는 점은, 자전거 이용자는 '자전거 전용신호'도 이용할 수 있지만, 보행자 신호에 따라 길을 건너도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네덜란드는 이런 자전거 도로망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대중교통과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차도와 인도가 있는 곳에는 십중 팔구 자전거 도로가 있고, 신호 교차로까지 포함해 자전거 도로가 모두 이어져 있다. 교차로에서는 노면 표시로 자전거도로가 보행자의 횡단보도와 구분되어 있고, 골목에서도 자전거 운전자에게 통행 우선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승용차가 어디선가 튀어나오지 않을 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덕분에 자전거 운전자는 멈췄다 출발하느라 힘겨워 할 필요도 없고,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시스템이 특별한 이유는 '자전거 전용신호'의 보편적인 보급에만 있지 않다. 첫째로, 대부분의 골목마다 설치되어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건널목을 마주하기 3미터 앞 부근에 감지 센서가 삽입되어 있다. 자전거가 위를 지나가는 것을 감지하면 자전거 신호가 좀 더 빠르게 켜질 수 있도록 교통 시스템 알고리즘이 짜여 있어서, 자전거 신호-자동차 신호의 켜지는 순서가 조정된다. 보행자/자전거 이용자가 건널목에서 대기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편리성을 높이는 이와 같은 전략을 교통공학 분야에서는 '교통수단간 스케줄링'이라 하고,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자동차가 적은 한밤중에는 자전거가 다가가는 건널목마다 곧바로 초록불이 켜지는 '홍해의 기적', 아니 '신호등의 기적'을 종종 만끽할 수 있을 정도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을 기다리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더니, 총 5개의 신호등을 기다리는 데 각각 20초, 7초, 5초, 6초, 0초가 걸렸다. (c) 글쓰는곰돌이


둘째로, '자전거 전용도로와 전용신호, 이를 고려한 알고리즘'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네이메헌'의 거의 모든 건널목에 기본으로 심어진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도시에 어떻게 첨단 교통 시스템을 들여올 수 있었을까? 국제무역을 중요시하고 물류-유통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에서 자동차보다도 자전거 우선, 사람 우선인 교통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주요 수출국가로서 물류를 중요시하는 한국이나 이웃나라인 프랑스, 독일만 보더라도 자동차가 교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기 때문에 보행자가 굉장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가령, 자동차들이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로를 넓히는 바람에 사람들이 지하차도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나, 자전거 도로가 완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 등이 그렇다. 반면에 네덜란드에서는 보행자라서 불편하다, 자전거라서 불편하다 라는 느낌보다도 '이런 데서 자동차 타고 다니기 참 피곤하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실제로 네덜란드, 스위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자동차가 속도를 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차량 이용이 줄도록 대중교통 체계를 다듬고 있다. 보행자 안전을 위해서다.


자전거 신호 외에도 네덜란드의 교통 시스템에서는 인간 중심적인 설계를 찾아볼 수 있는데, 왕복 4차선 이상인 도로에는 건널목 가운데에 섬처럼 보행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보행섬'이 있고, 보행자 신호가 반으로 나뉘어 있어서 신호가 끝나기 전에 완전히 건너지 못한 사람들이 다음 신호를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다. 아래를 보자.


도로 중앙에 있는 '보행섬'은 보행자 보호의 상징으로, 걸음이 느린 어린이나 고령 보행자를 배려하는 교통공학의 상징이다.(c) 강한솔


이 경우 보행섬에 사람이 위치한다면, 건너편이 초록불이기 때문에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지만 건널목을 아직 건너지 못한 사람(필자)은 가운데로 건너갈 수 없다. 순차적으로 켜지고, 순차적으로 꺼지는 보행자 신호는 초록불이 깜빡일 때 허겁지겁 뛰어드는 사람들을 제지할 수 있고, 보행속도가 느린 노약자-장애인이 안전하게 건널목을 건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행섬은 교통사고율을 낮추는 전략 가운데 하나로, 국제 보행자 연맹(IFP) 크리스티안 토마스 박사가 관련 인터뷰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건널목 신호가 건장한 성인 중심으로 설계되어 노약자/장애인이 위험에 빈번하게 노출되는 한국과 대조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네덜란드는 자전거와 승용차 간 사고가 발생할 시 승용차 운전자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과하고, 대부분의 교차로에서 자전거나 보행자가 항상 승용차에 우선하도록 법을 제정해 도로의 주인이 승용차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매력은, 일상 속에서 '사람'으로서 배려받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있거나, 자동차가 없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가에 관계없이 안전을 중요시하고 사용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시스템. 네덜란드는 공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UX(User Experience) 디자인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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