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교포 1세대 할머니들의 이야기
얼마 전 맥북을 구매하면서 애플tv 3개월 무료 구독권이 생겼다. 나는 두 가지 오리지널 콘텐츠를 보고 싶었는데, 하나는 <선사시대 : 공룡이 지배하던 지구> 다큐 시리즈였고, 다른 하나는 <파친코>라는 드라마였다.
소설 <파친코>는 2019년 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각광받을 당시, 독일에 사는 루디 아저씨가 추천해 주셔서 이미 읽은 상태였다. 추석 연휴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연휴 동안 가족들의 잔소리(?)에도-집에까지 내려와서도 책을 읽을 거냐는 서운함의 말-두 권을 다 읽을 만큼 흡입력 있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전개되는 이야기에 오랜만에 대하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소설은 영상보다 훨씬 묘사가 섬세해서 상상의 여지가 많은 편인데, 그 당시 소설을 보며 일본 이주 1세대가 개, 돼지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던 상황 묘사를 보며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애플 tv 드라마로 본 <파친코>는 책보다는 훨씬 압축적이지만, 영상을 통해 1910년 전후의 한국과 일본 상황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소설도 드라마 용으로 잘 각색되어 있었다. 덕분에 재미있게 드라마를 쭉 이어 보았다. 그렇게 8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남편을 따라 일본 오사카로 이주해 살아가던 여주인공 ‘선자’가 남편 ‘백이삭’이 가정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시장에서 김치를 팔기 시작한 장면이 끝났을 때였다. 문득 검은 화면 가득히 텍스트가 나타났고, 뒤이어 재일교포 1세대 할머니들의 인터뷰가 재생되었다.
나는 선자가 시장통으로 김치 두통을 담은 커다란 리어카를 끌고, 냄새가 난다는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며 정육업자 옆에 자리를 잡고,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점차 목소리를 키워가며 너른 길가로 나가 본격적으로 김치를 파는 그녀의 변화를 보며 이미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이 자막과 인터뷰 영상 때문에 혼자 소리 내 울고 말았다.
처음 노출된 글자들은 이런 내용이었다.
Over 2 million Koreans moved to Japan during colonial rule.
200만 영 이상의 한국인이 식민 지배 때 일본으로 이주했다.
About 800,000 of them were brought over by the Japanses government as laborers.
그중 약 80만 명은 일제에 의해 노동자로 끌려갔다.
The majority returned to their homeland at the end of WWII.
대부분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But about 600,000 remained and became a stateless people.
하지만 약 60만 명은 일본에 남아 무국적자가 되었다.
These are some of those women’s stroies.
이 이야기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다.
They endured.
그들은 견뎌냈다.
텍스트에 이어 곧 재일교포 1세대 할머니들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었다. 인터뷰에 응한 할머니들은 10~20대에 일본으로 가게 된 분들로 현재 나이가 90~100세에 이르셨다. ‘힘들었다, 슬펐다’고 말하셨지만, 그때의 참상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으셨는데, 그럼에도 툭툭 던지는 말들에 그 혹독했던 시간들이 언뜻언뜻 비쳤다.
우린 운이 좋아서 먹을 만한 양배추가 있었는데 그들(일본인)은 그게 천황의 소유라면서 달라고 명령했어요. 우리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다들 김치를 먹었어요. 먹을 게 없으니까 김치를 많이 먹었죠.
밥그릇에 밥이 거의 없었어요. 밥그릇을 뒤집어서 남은 게 있나 없나 확인했어요. 그렇게 살았죠. 지금은 사는 게 사치스러워요.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우리 애들이 한국에서 살 수 없으니까 일본 사회에 동화되도록 했어요.
지금은 사는 게 사치스럽다는 말이, 이런 말은 싫지만 애들이 일본 사회에 동화되도록 했다는 말이 너무 마음 아팠다. 생각해보니 이 모든 이야기들이 드라마 <파친코>에도 녹아 있었는데, 곧이어 든 생각은 지금의 내 삶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누리는 이 물질적 여유와, 한국인으로서 누리는 권리, 그리고 평화로운 일상 말이다. 역사를 꾸준히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것 때문인 것 같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도 없고, ‘보장된 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평화, 권리, 여유, 자연 등 지금 우리가 누리기에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에 응당 감사해야 하고, 또한 그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니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뉴스를 보다가 뉴욕에서 독립기념일 축하 행렬을 대상으로 총기 난사를 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단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대상으로 오랜 시간 전쟁을 벌이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도 내전이 이어지는 나라는 많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가 ‘평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인 선함’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 옳음’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더 지금의 안전과 평화에, 그리고 내가 누리는 것들에 감사하고, 또 사회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은 미미하지만, 그렇다고 나 하나가 뭘 할 수 있겠냐며 개개인이 모두 눈을 감아버리면 우리는 아둔한 우두머리 밑에서 아둔한 결정에 그저 따라야 할 뿐, 어떤 변화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드라마를 보다 왠지 서러워져서 쓰기 시작한 글인데, 어쩐지 글의 맺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콘텐츠의 힘을 믿는 사람인데, 애플이 <파친코>를 오리지널 콘텐츠로 만들겠다고 결정한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경제적 이유와 브랜딩의 이유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으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콘텐츠로 인해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못난 모습이, 일제 강점기 전후의 한국인이 처했던 비참한 나날들이 자연스럽게 세상에 알려진다고 생각하니 그것 또한 좋았다. 그런 의미로 애플 TV를 구독한다면 드라마 <파친코>를 보며 View 수를 올려주길! 그리고 드라마를 보지 않겠다면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 2019년에 쓴 소설의 리뷰는 여기에서 > https://brunch.co.kr/@bravewhale/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