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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고래 Mar 20. 2021

세상에 유연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탐구를 통해 나를 알아갈 것

마이너스 12 센티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유연성 측정 테스트의 결과다.  결과는 마음한켠에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었다. 짓궂은 남자애들은  테스트  얼마간 나를 ‘통나무라고 놀려댔다. 이제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래서  에피소드는 재미와 더불어 '당황' '수치(?)' 함께 떠오르게 하는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테스트 이후 나는 스스로를  '유연성이 없는 사람'으로 정의 내려왔다.


오래 수영을  왔던 나는 코로나 이후, 수영장이 하나  문을 닫으면서 새로운 운동, 요가를 시작했다.


'유연성'에 대한 어떤 콤플렉스가 있어서인지, 나는 늘 온몸을 쭉 뻗는 발레리나의 우아한 동작과, 자기 스스로의 몸만 가지고 수많은 동작을 소화하는 요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우울한 코로나 시국에 정신 건강도 돌볼 겸, 몸도 더욱 튼튼하게 단련할 겸 요가를 시작했다.


처음엔 역시나였다. 나는 정말 햄스트링이 선천적으로 짧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른 자세로 서서 머리를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팔을 바닥으로 쭉 뻗는 우타나사나 동작이나, 숙인 자세에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며 허리-척추를 쭉 펴는 아르다 우타나사나 동작을 하면 손이 허공에 붕 떠서 당최 바닥에 닿을 줄을 몰랐다. 그 상태로 컷닝을 하는 아이처럼 옆을 쓱 훑어보면 다들 폴더처럼 허리를 잘 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햄스트링이 짧아 허리를 숙여 손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아쉬운 일이었지만, 사실 이런 일로 좌절하기에는 나도 살아온 세월이 있는지라(인내가 생겼다는 말?) 요가를 계속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어떤 자세들은 남들보다 훨씬 더 잘 되었기 때문에 '나는 요가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셀프 최면으로 요가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몸을 앞으로 접어 귀를 압박하는 동작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자세를 고쳐주시며 이런 말을 하셨다.


"아이고, 유연성 좋은 신 것 좀 봐."


그렇다. 다리를 접어 허벅지 안쪽에 귀가 닿게 만드는 동작인 피다사나는 사실 허리와 다리 관절 주변의 유연성이 좋아야 잘할 수 있는 동작인데, 내가 그 동작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앉아서 윗몸 앞으로 굽히기'를 통해 측정 가능한 영역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뿐 나도 유연성이 좋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교과 과정에 속한 획일화된 테스트로 인해 자신의 능력이나 선호의 영역을 정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요가를 통해 깨닫게 된 것처럼 학창 시절에 경험했던 단편적 경험으로 내가 무언가를 잘하거나, 어떤 한계를 가진다고 정의 내려 버리는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인 것 같다.


만약 어린 시절 단 한 종류의 유연성 테스트로 인해 내가 '나는 유연성 없는 사람이니까, 요가나 발레는 어려워.'라고 생각하고 요가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도 나를 통나무로 만들어버린 교과과정의 '유연성 테스트'가 너무나도 얄밉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학교에서, 단편적인 테스트로 측정당한 결과 값 만으로 스스로의 특징을 섣불리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우선 해보자. 그러다 보면 숨어있었던, 당신도 모르던 당신의 능력을 알게 되는 행운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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