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바꾼 단 한 권의 책

마일리지처럼 쌓이기 시작한 나의 한 시간

by 희너지

“엄마, 난 커서 수영선수가 될 거야.”

"응? 얼마 전까진 고깃집 사장이 꿈이라더니."

“아니야. 이제 바뀌었어. 수영선수 할래.”


수영학원을 다닌 지 다섯 달째. 이제 막 열 살이 된 아이의 꿈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는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영선수도 멋지지.”

사실 그 순간, 아이의 말보다도 ‘이렇게 쉽게 꿈을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부러웠다. 바뀌어도 되고, 망설여도 되고, 다시 고쳐 말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시기. 나는 언제부터 꿈 앞에서 이렇게 조심스러워졌을까.


수영학원은 차량 운행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매번 라이더가 된다. 수업이 시작되면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어떤 날은 눈을 붙인다.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잠깐 스르르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세상과 나 사이에 낀 먼지가 조금 털린 기분이다. 그렇게 네 달 동안, 하루 한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냈다. 그 시간은 내게 ‘쉼’이었지만, 동시에 ‘비어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다 2026년 1월이 되었다. 그리고 작지만 분명한 균열이 생겼다.


4년 전, 한 권의 책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꾼 적이 있다.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한다> 그 책을 읽고 나는 미라클모닝을 시작했고, 하루 중 가장 먼저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시간들이 쌓여 10년 만에 경단녀를 탈출했다. 그래서 나는 늘 그 책을 ‘인생책’이라 불렀다. 그런데 새해가 되어 지인의 추천으로 한 책을 읽기 시작하던 날,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도, 아, 이 책은 오래 남겠구나 하는 느낌. 마일리지 아워였다. 최유나 변호사의 신간.



책 속의 저자는 참 많은 역할을 동시에 살아내고 있었다. 이혼전문변호사이자 법인 대표, 작가이자 강연자.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 ‘대단하다’는 말 뒤에 곧장 ‘나는 못 해’라는 변명이 따라붙을 삶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설렘이 피어올랐다. 이 사람은 바쁘게 살지 않고 있었다. 정신없이 시간을 쥐어짜지 않고, 자기 삶의 중심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책은 말했다. 하루에 단 한 시간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그 한 시간을 마일리지처럼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목적지에 닿아 있을 거라고.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하루 한 시간. 그 말이 이상할 만큼 무겁게 다가왔다.


나는 최근 3년 사이에 많은 것을 이뤘다. 누구 엄마가 아니라 온전히 나로 불리는 삶, 꿈꾸던 삶의 입구에 서 있었다. 원하던 직업을 얻었고,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도 손에 쥐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이 늘 허전했다. 반복되는 일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초심을 잃은 채 ‘현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나는 하루를 ‘견디는 단위’로만 살고 있었다. 하루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유튜브를 켜고, OTT를 틀었다. 그건 휴식이었지만, 동시에 도피였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여전히 마음 어딘가에 있었지만, 꺼내 들기엔 조금 부끄러운, 오래된 소망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그때 이 책은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지금부터 다시 적립하면 된다고. 나는 결심했다. 하루 한 시간, 다시 꿈을 향해 시간을 쓰겠다고.


아이의 학원 라이더 시간은 늘 ‘버리는 시간’이라 여겼다. 피곤하고 지친 날엔 특히 그랬다. 하지만 시선을 바꾸자, 그 시간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대기 시간일지 몰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온전한 ‘나의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보호자 대기실을 벗어나 로비로 나간다. 작은 책상 위에 노트북을 펼친다. 아이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대신 나는 문장 속으로 잠수한다.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윤아, 네가 수영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했지? 엄마도 엄마 책이 세상에 나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너 수업 시간 동안 엄마가 저기서 글 써도 될까?”

아이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괜찮아. 나 혼자서 잘할 수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괜히 더 단단해져야 할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은 이후로 주말을 제외한 매일, 하루 한 시간 글을 쓰고, 한 시간 책을 읽는다. 아직 눈에 띄는 성과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루를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는다는 감각. 오늘도 꿈을 위해 마일리지를 적립했다는 작은 안도감.


1년 뒤, 5년 뒤, 10년 뒤의 나를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사람이자 '출간 작가'의 꿈을 이룬 사람.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지금의 나는, 아주 오랜만에 꿈을 이야기하던 아이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얼굴 위로, 보름달 같은 수줍은 미소가 조용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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