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이라 쓰고, 서러움이라고 읽는다.
시댁에서 김장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참으로 서럽게도 울었다.
그날 뱃속에 있던 아이가 8살이니 벌써 8년 전이구나. 지금은 결혼한 지 11년 차. 결혼 10년이 넘어가니 웬만한 일은 허허 웃으며 넘기지만 그날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며느리라면 시댁에 섭섭했던 것 물으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나는 그것이 바로 8년 전 시댁 김장날이었다.
결혼하고 첫 해는 맞벌이라 패스. 둘째 해는 첫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패스. 김장에 참여한 지는 이제 두 번째였다. 두 번 김장한 거 가지고 뭐가 그렇게 서럽냐고? 그때 난 출산예정일 한 달 앞둔 만삭의 산모였다.
만삭의 몸으로 김장이라니. 설마 오라고 하실까? 싶었지만 역시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배추 절이고 씻는 건 알아서 할 테니 버무리는 날은 오라 하셨다. 교대근무자인 남편은 하필 출근하는 날. 있어도 도움이 안 된다 안돼. 아침 일찍 갓 두 돌 지난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부랴부랴 시댁을 향했다.
사실 시댁은 매 해 김장할 때마다 동네 친한 지인분들과 품앗이하듯 담그셨다. 며칟날 우리 집 김장하니 몇 시까지 오라고 알리면 다들 일사불란하게 맞추어 오셨다. 그래서 솔직히 올해는 며느리 곧 출산인데 쉬라고 하시겠지라는 마음이었는데 역시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바람일 뿐. 시댁에 도착하니 이미 버무리고 계셨다. 오라는 시간보다 빠르게 서둘렀는데도 지각한 느낌. 얼른 고무장갑과 앞치마를 장착하고 앉아 버무리기 시작했다.
12월 어느 날. 겨울날씨치곤 많이 춥지 않은 날이라 날 한번 잘 잡았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지만 집 안에서 하는 김장도 아니고 밖에서 하는 김장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시작하자마자 코는 빨개졌고 흘러나오는 콧물에 내들 훌쩍였다. 손가락, 발가락은 점점 감각이 없어져갔고 쪼그려 앉아 버무리기만 반복하니 만삭의 배는 점점 뭉치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도톰한 외투를 입어서 다들 내가 임산부로 보이지 않는 걸까? 어떻게 한 분도 쉬며 하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걸까? 뭉치는 배만큼 내 마음도 서러움으로 똘똘 뭉쳐지기 시작했다.
어른들 앞에서는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하며 힘든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혹여 임신이 벼슬이냐는 소리를 들을까 봐. 김장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가니 이제 남은 건 지인분들의 식사 챙기기. 수육에 김치 하나면 된다고 하시지만, 어른만 10명 내외의 상 차리기 및 설거지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식사가 시작되고 나는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고 그저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뒷정리와 설거지까지 얼른 마무리하고 도망치듯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마자 참았던 서러움이 솟구쳐 차가운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순식간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고 손 발은 이미 꽝꽝 얼어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 어떻게 집까지 운전하고 왔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날 저녁 퇴근해 온 남편에게 쏟아부었다. 화의 눈물인지 서러움의 눈물인지 어머니를 향한 원망인지 남편을 향한 원망인지 모를 모든 것들을. 눈치코치 없는 남편은 이렇게 화낼 일이냐고 맞받아쳤고 그런 남편을 보니 앞으로의 결혼 생활이 안 봐도 뻔하겠다 싶어 그만 살자고 말했다. 그깟 김장이 도대체 뭐라고.
8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이 다 이해되진 않는다. 시부모님은 아들만 둘이셔서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을 모르시는 걸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노력해도 결국 끝은 어머님도 여자라는 점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젠 그분들을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단 그저 그려려니하고 넘기게 된다는 점이다. 내 부모님도 답답할 때가 많은데 어찌 시부모님까지 내 마음 같을까. 한 이불 덮고 자는 남편도, 내 뱃속으로 낳은 아이들도 심지어 나 자신도 이해 안 될 때가 많은데 말이다. 이제는 8년 전 그날을 "그땐 그랬지" 남 이야기하듯 가볍게 말할 수 있다. 흐른 세월만큼 서러움도 옅혀 졌고 나도 그러려니가 되는 진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