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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Aug 14. 2021

미스타 안, 아메리카에 가다

Bravo, my life!(16)

대필 작가의 말


 새로운 세상을 본 아기들이 이런 기분일까요? 할아버지의 첫 미국행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만 봐도 여행 정보가 넘쳐 나지만 그땐 아니었으니까요. 국외 출국 자체가 쉽지 않던 시절, 오롯이 본인이 보고 듣고 부딪히며 하나하나 알아갔던 미국 이야기. 할아버지 글을 읽으면 왠지 가보지도 못한 시절, 가보지도 못한 미국이 그리워집니다. 아니 어쩌면, 무언가를 우호적이고 순수한 호기심으로 대할 수 있는 그 '첫 마음'이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어요.




 3개월 뒤, 야전 병원 T/O가 없어지면서 이동 희망 병과를 택하라는 공문이 왔다. 왠지 탄약 병과로 가야 미국에 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쪽을 희망했다. 그렇게 나는 감사한 일이 많았던 야전 병원을 떠나 505 병기단으로 전속되어 103 탄약중대에서 복무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육군본부 해외유학반에서 전화가 왔다. 전에 가기로 했던 과정은 내가 야전 병원으로 가는 바람에 딴 사람이 갔다면서, 대신 병기 학교 포전차 포탑 과정 교관요원 3개월 자리가 있으니 희망하면 내일이라도 면접을 보라고 했다.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꼭 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면접에 참가했다. 면접관은 둘 다 소령이었다. 얼마나 군대에 오래 있었냐,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냐고 묻기에 10년 됐고 가족은 다섯 식구인데 처, 딸 둘, 아들 하나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영어는 어디서 배웠냐, 고향은 어디냐 등의 질문을 받았다. 고향이 황해도 옹진이라 했더니 노스 코리아냐고 해서 전에는 우리 고향이 남조선이었는데 6.25 이후에 북쪽이 되었다고 대답했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면접관이 대뜸 요번에 가서 많이 구경도 하고 많은 것을 배워오라고 했다. 거의 붙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바로 다음날 해외 교육반에서 전화가 왔다. 미국에 가게 되었으니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받고 최종 언어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시험은 용산에서 봤다. 전축에서 문제가 나오면 듣고 O X 표시하는 형식이었다. 나는 73점을 받았다. 나쁘지 않은 점수였다. 유학반에 초청장을 받으러 갔더니 벌써 여권도 준비되어 있었다. 5  출발이라는 말을 듣고 나오는데 마치 꿈만 같았다. 일이 풀리기 시작하니 일사천리였다. 세상사 운칠기삼이라지만 3할의 노력이 없다면 7할의 운수가 도와도 뜻을 이룰  없는  아닐까. 절망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공부를 놓지 않았기에 좋은 기회를 잡을  있었다.


 출국 전에 여비와 정복, 모자 대금이 나왔다. 나는 정복과 모자가 이미 있었기에 그 돈을 집사람에게 주면서 한복을 한 벌 해 입으라고 했다. 그때 집사람이 하늘색 저고리와 노란색 치마를 멋지게 해 입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출국일에 온 가족이 택시를 타고 김포 비행장으로 마중 갈 때도 그 옷을 입고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도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로 고왔다.


 김포에서 일본까지는 군용기로 가게 됐다. 기내는 어두컴컴했고 나를 제외한 탑승객 60명가량이 모두 미국인이었다. 이륙  10 정도 지났을까,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의 호주머니에 차고 있던 만년필 잉크가 솟구쳐 호주머니에 묻을 정도였다. 태연한 척하고 싶었지만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눈은 질끈 감겼다. 흔들림이 멈추고야 겨우 창밖을 내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짙푸른 바다가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잠시 후 흑인 크루가 커피를 주면서 “윗 슈가”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옆자리 여자에게 실례지만 저 사람이 뭐라 하냐고 물었더니 커피에 설탕 타겠냐는 말이라고 했다. 이렇게 간단한 말도 알아들을 수 없다니! 부끄럽고 놀라운 마음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심식사로는 Doggy bag에 치킨 프라이가 나왔다. 남들 먹는 거 봐가면서 부지런히 속도를 맞추었는데도 1/3을 채 먹기 전에 딴 사람들은 벌써 도기백을 꾸깃꾸깃하여 의자 밑으로 넣고 있었다. 혼자 먹기가 그래서 나도 슬며시 구겨 의자 밑으로 밀어 넣었는데 옆자리 여자가 힐끗 보더니 내 도기백을 빼서 초콜릿, 담배, 껌을 꺼냈다. 눈치 보지 말고 천천히 식사 마치고 이따 이것들도 먹으라고 했다. 다 비행기표 가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됐다. 내가 메릴랜드에 있는 육군 병기 학교로 교육을 받으러 간다고 했더니 거기서 멀지 않은 필라델피아에 자기 집이 있다면서 반색했다. 내가 졸업할 때쯤이면 자기도 집에 있을 테니 놀러 오라며, 전화하면 학교로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안타깝게도 졸업 후 곧바로 앨러바머로 가게 되어 전화를 못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용산 서비스 클럽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본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내일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울에 가면 우리 집에 전화를 해서 “일본에 잘 도착했고 내일 8시에 미국으로 출발한다”라고 전해줄 수 있냐고 했더니 알겠다고 했다.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나중에 집에서 온 편지를 보고 그 여자가 약속대로 전화를 해주었던 것을 알았다.


 일본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8시에 유나이티드 항공을 탔다. 9시쯤 기내식으로 비프스테이크와 샴페인이 나왔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것들이었다. 그날은 태평양에 있는  해군기지인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이곳 BOQ 설비와 식사도 굉장히 좋았다. 다음날 오후 1시쯤 호놀룰루에 도착했는데 가는 곳마다 낯선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안도 훤하고 나무들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런닝에 슬랙스를 입은 여자들이 맨발로 검고 깨끗한 땅바닥 위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비행장은  얼마나 넓은지 왔다 갔다 하는 비행기들이 마치 작은 게들처럼 보였다. 다른 나라에  것이 실감 났다.


 4시경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다. 안내인을 따라서 그 당시 우리나라 중앙여객 같이 생긴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랐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차들이 양쪽으로 네 줄이나 오고 가는 것이 마치 자동차 경주를 보는 것 같았다. 도로 양옆에는 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양 수백 마리가 몰려다니면서 풀을 뜯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노랗고 빨갛고 파란 지붕의 집들이 펼쳐진 모습도 알록달록 꽃밭처럼 예뻤다. 기나긴 여정, 그리고 그 끝에 마주한 미국의 첫 모습은 아직도 선명한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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