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my life!(18)
대필작가의 말
오늘은 할아버지가 쓰신 원고 사진을 첨부해 봤습니다. 할아버지가 생각나실 때마다 틈틈이 작성하신 내용이에요. 이 원고들과 구술하신 내용 등을 종합해서 정리하는 게 제 일이지요.
개인의 역사지만 저희 가족의 역사이기도 한, 또 감히 우리나라의 역사의 일부라고 말하고 싶은 소중한 원고들입니다.
1.
미국 가기 전에 처남댁이 싱거미싱 좋은 걸 하나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근처에 살면서 신세도 많이 졌고 해서 꼭 사가겠다고 했다. 물어물어 미싱 가게를 찾아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류도 많고 외관이나 성능도 최고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그런 기계도 없을뿐더러 있어도 중고나 겨우 구할 수 있는 때였다. 240불에 가장 좋은 전자동 미싱을 구입했다. 천 가장자리부터 시작점을 잡고 무릎으로 스위치만 누르면 실도 쉽게 박을 수 있고, 꽃무늬 샘플도 있어 번호를 누르면 자동으로 꽃수도 넣을 수 있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며칠 뒤 워싱턴 대사관에서 우리나라 신문을 받아서 보는데 5·16 이후 풍속을 강하게 단속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장발은 머리를 자르고 하이힐은 신발을 벗기고, 무엇보다 외제는 아예 못 들여오게 한다고 했다. 풍속뿐만 아니라 언론도 단속하는 듯했다. 신문의 몇몇 기사는 검은 먹으로 죽죽 칠해진 채 오곤 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미싱이고 뭐고 처남댁에게 보여주기도 전에 뺏길 판이었다. 도로 가게에 가지고 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알겠다고 하면서 두고 가면 자기가 본사에 알아봐서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난 뒤 미싱 회사 직원이 학교로 찾아왔다. 돈을 꺼내 주면서 잘 해결됐다기에 세어 보았더니 240불 그대로였다. 당시 우리나라 같으면 몇 프로는 떼고 주었을 텐데 받았던 돈을 그대로 돌려준 것도 그렇고 굳이 갖다 준 것도 굉장히 고마웠다. 언젠가 우리나라 회사들도 물건을 구입한 사람의 입장에서 신속하고 친절하게 일처리를 해주는 날이 올까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우리가 미국을 앞서 있는 것 같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이러한 것에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실감하곤 한다.
2.
어느 날 하굣길에 비를 피하다 그 동네 사는 학교 사람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그가 다음 주 토요일에 자기 집에 오지 않겠냐고 초대했다. 현지 사람들 사는 모습이 궁금하던 차에 기꺼이 수락했다. 토요일에 가보니 나 말고도 초대받은 사람 몇몇과 그의 딸이 있었는데, 한국 나이로 14세라고 했다. 그는 일부러 딸들으라는 듯이 한국에서는 14세짜리가 제 마음대로 연애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아 딸의 편을 들어주려다 솔직하게 '한국은 20세가 넘어도 부모 허락 없이는 연애하기 힘들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라마다 다르군요,라고 반색하며 딸의 표정을 살폈다. 아마도 딸이 연애하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딸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참 이상한 나라라고 맞받아쳤다. 지금이야 연애나 결혼은 개인의 자유에 맡기는 게 당연하지만 1960년대 우리나라는 좀 엄격했던 것 같다. 나부터도 '연애하는 14세'란 말에 꽤나 생경한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14세는 양반(?)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학교 사람 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휴가를 받아 1주일 간 그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거기 있는 10세 딸애가 틈만 나면 자기 보이프렌드 자랑을 해댔다. 차 뒷좌석에 같이 타고 갈 때도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한다고 떠들어대곤 했다. 운전 중이던 아버지가 그만 하라고 타일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대담하고 표현도 거침없는 모습이 내가 알던 10세 아이들과는 달랐다. 그 모습이 좋은 듯도 하다가 막상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망설여졌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 아빠구나 싶었다.
그 사람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받은 문화충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동네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즐비했고 새로 지은 멋진 집이 많았다. 그도 큰 집과 자가용을 갖고 있었는데, 지하실은 전체가 무도장이었고 집 주변에는 푸른 잔디밭과 자동 급수 장치까지 되어 있었다. 정말 영화에 나오는 생활 같았다. 마을을 걷다가 자두 과수원을 발견하고 자두를 좀 살까 했는데, 팔지 않겠냐고 하니 주인이 선뜻 큰 자루에 자두를 가득 담아 그냥 내주었다. 자기 동네에 온 선물이라고 했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이런 걸까, 우리도 언젠가는 이렇게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조금은 부럽고 서글프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