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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Jul 18. 2021

미국, 님은 먼 곳에

Bravo, my life!(14)

대필작가의 말

- 미국 유학을 위한 할아버지의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어째 쉽지가 않아 보이네요. 오늘  영화에서 나온 대사가 문득 생각납니다. 고통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이런 내용이었는데요. 할아버지의 글을 정리하며 보니 영화를  때보다 더욱 와닿네요. 할아버지 세대에는 정말  사람의 힘으로 어쩔  없는 난관이 많았던  같은데요. 그렇게 넘어질 때마다  번이고 다시 일어서서 노력하신 덕분에 지금의 저희도 있고  이야기도 있는 거겠죠.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원대 복귀를 한 이후 강 중위님의 조언대로 시간만 있으면 듣고 쓰는 연습을 했다. 딴 사람 같으면 몰라도 실력 있고 믿을 만한 분의 이야기라 꾸준히 실천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AFKN을 아무리 들어도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알 수 없는 소리만 호록호록 귀를 스쳐갔다. 안타깝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했지만 여하튼 꾸준히 했다. 지금에야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만 당시에는 혼자 노력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육군 회보가 내려왔다. 도미 유학시험 희망자는 원서를 유학반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 유학이라니! 인생에 아주 큰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지체 없이 군 방공유도탄 교육 17개월 과정을 지원했다. 아주 추운 겨울날, 삼각지에 있는 상명여중으로 시험을 보러 갔다. 영문 해설과 한영 번역 등이 나왔는데 빨리 답을 쓰고 몇 번이고 훑어볼 시간도 있었을 정도로 쉬웠다. 결과는 무난하게 합격이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동안 실력이 쌓이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쫙 펴지고 자신감이 붙었다.


 합격 통지와 동시에 육군부관학교 군사영어반에 가서 14주간 교육을 받으라는 통보가 내려왔다. 교육 마지막 날 최종 시험을 거쳐 유학생을 선발한다고 했다. 대대장께 보고를 하고 경북 영천에 있는 육군부관학교로 갔다. 다음날부터 영어교육이 시작되었는데 교육 방법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완전 달랐다. 하루 종일 영어만 배우는데 교관이 와서 군사영어와 Dixon 책을 가르쳐 주었다. 정규 과목이 없는 날은 미리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를 타 가지고 하루 8시간씩 녹음실에서 따라 읽거나 혼자 녹음을 했다.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내가 장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원인은 폐병이었다. 도미를 위해서는 영어뿐만 아니라 신체검사도 합격해야 했는데, 폐병이 단기간에 나을 리 만무하니 사실상 미국행이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력을 쏟아 준비하던 일이 제대로 도전도 못해보고 끝난다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일단 약을 받아먹기 시작했지만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얼마 뒤 집에 돌아오다가 영천 모처의 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이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여기서 떨어지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노력과 상관없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자꾸 길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 지긋지긋한 운명의 장난을 내 손으로 끝내 버리자. 난간을 올라가려는 순간 섬광처럼 애들과 집사람의 얼굴이 스쳐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가족들에게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인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기차를 타고 안양에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데 창렬이와 혜선이가 아빠를 부르며 달려 나왔다. 집사람도 함께였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몇 주 되어 시커메진 얼굴을 보여주기 민망스러웠는데 아이들은 그저 제 아비가 온 것이 반갑고 좋은 모양이었다. 녀석들의 모습을 보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해내야 할 것 같은 용기가 샘솟았다.

    

 최종 시험 날, 문제가 꽉 찬 종이 열 장 가량이 묶인 시험지를 받았다. 심호흡을 하고 한 줄씩 읽어 내려가는데 맙소사! 본 적도 없는 차의 부속 명칭이며 엔진의 작동원리 등 생전 처음 보는 내용이 가득했다. 날더러 계속 죽으라 죽으라 하는 것 같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찌어찌 3분의 2쯤 답을 써내려 갔는데 도저히 그 이상 답을 적을 수가 없었다. 이 겨울에 여기까지 와서 헛고생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니 다들 허탕 쳤다고 했다. 다음날 졸업식을 하고 원대 복귀를 하자니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체념은 했지만 영어 공부는 계속했다. 끝까지 포기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2, 3개월 후 육군본부에 볼일이 있어서 간 김에 결과를 물어보러 유학반에 들렀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차라리 얼른 결과를 듣고 싶었다. 지난번 군사 영어반 43기 졸업을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학번을 물어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은 요동쳤다. 얼마 뒤, 담당자가 서류에서 눈을 떼더니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설마...?


 "합격입니다, 축하합니다!"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험을 잘 친 것 같지 않았는데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니 엉뚱하게 병기장교용으로 나온 문제들이 다수 출제되어 그것들을 제외하고 채점했다고 했다. 다시 조그마한 희망이 생겼다. 그런데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장면 박사가 국무총리가 되면서 군 장병을 주특기대로 보직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나는 주특기인 의무 보좌관으로 보직이 되어 T/O가 있던 제5야전병원으로 전속하게 되었다. 미국 유학은 점점 요원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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