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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Mar 21. 2021

1945년 그해 여름

Bravo, my life!(5)

 내 장래희망은 선생이었다. 경험의 크기가 제한적인 작은 마을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애들에게 선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춘천사범학교를 지원했는데 시험 보러 가기도 전에 1차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지원 가능 연령에서 두 달 초과되었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사범학교에 합격하면 5년 후에 선생님이 될 수 있고 수업료도 면제인데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난 것이다. 우리 선생님도 나만큼이나 낙심하신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제자를 북돋아 주려 그동안 고생했으니 며칠 쉬라고 배려해 주시고, 새로 생긴 해주 사범학교 1년짜리 특설 강습과에 시험을 쳐보라고 권유해 주기도 하셨다. 나도 선생이 되면 이렇게 학생들을 아끼고 힘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굳은 각오로 해주 사범학교 시험을 보러 갔는데 같은 반 조선행이는 붙고 나는 떨어졌다. 내 키가 너무 작아서는 아니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무렵 토요일이면 소강에 가서 훈련을 받았다. 어느 날 권 선생님이 요번 4월에 삼종 시험이 있으니 경험 삼아 가보라고 하셨다. 지원서를 내고 황해도 해주도청 학무과에서 수험표를 받았다. 시험 전날, 여관에서 저녁을 먹고 바람을 쐬러 나가보니 시험 보러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미 교편을 잡고 있는 사람도 있고 농업학교를 마친 사람도 있었다. 나더러 어딜 나왔냐고 묻기에 시험 삼아 경향을 알아보러 왔다고 했다. 이야기 중 누군가 "전에 성냥갑 평면도를 그리라고 컴퍼스와 도화지를 내준 적이 있다”라고 했다. 컴퍼스를 빌려서 그려보니 어린아이도 풀 수 있을 만큼 쉬웠다. 이 시험은 경쟁이 없는 검정시험이라 사람들이 친절했다.     


시험 당일, 첫 시간이 수공 시간인데 진짜 성냥갑의 평면도를 그리라는 시험 문제가 나왔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어제저녁의 경험을 떠올려 컴퍼스로 각을 정확히 재면서 평면도를 그려냈다. 다음은 도화 시간이었다. 연필 한 자루와 도화지 한 장을 주면서 ‘자기 왼손을 쥐고 사생화를 그리라’ 고 했다. 왼손을 쥐고 보이는 데는 흰색으로 두고 검은색으로 그늘진 곳을 칠해서 냈다. 셋째 시간은 습자 시간으로 ‘一勤天下無難事’라는 문제와 함께 반지 한 장, 붓과 먹이 나왔다. 학교에서 여러 번 써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써 내려갔다. 나중에 보니 밑의 간격이 좁았지만 느낌이 괜찮았다. 세 시간 뒤 시험이 끝났다. 원래 여관에서 하룻밤 더 자려고 했는데 난방불을 때 주다 말기에 추워서 그냥 집으로 갔다.      


 약 한 달 후 황해도청에서 편지가 왔다. 저번 시험 결과였다. 귀하는 시험성적이 우수하므로 가량 증명서를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수공, 도화 두 과목이었다. 6월 시험에서는 국어와 한문에 대한 가량 증명서를 받았다.  이 공문이 소강 국민학교에도 갔다는 걸 알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토요일에 훈련을 받으러 갔더니 권 선생님이 부르셨다. 학교에서 나를 쓰겠다고 학무과에 추천서를 올렸다는 것이었다. 정말 고마웠다. 언제쯤 면허가 내려올진 모르지만 벌써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 같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여름날이었다. 볼일이 있어 학교에 들렀다 운동장에서 권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환히 웃으며 ‘너 촉탁 면허가 내려왔다. 다음 주에, 8월 20일부터 학교에 나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정말로 기뻤다. 사범학교를 떨어진 후 희망이 없던 교원 생활이 시작된다니 꿈만 같았다. 그때, 급사가 교무실의 라디오를 들고 나와 연병장 연단에 올려놓았다. 애들 체조시간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찌르럭 소리가 나더니 일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코레 이마 센소오 야메따(이제 전쟁을 그만두었다).”

 

 1945년 8월 15일,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낡은 라디오로 해방의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앞으로 5일만 있으면 소원이던 선생이 될 텐데 난 어떻게 되는 걸까 등등 닥쳐올 변화가 어린 마음에 잠시 두려웠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 우리는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세를 외쳤다. 어찌 되든 앞으로 더욱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솟아올랐다.      


 학교는 그날 이후 약 20일 만에 문을 열었다. 나는 연봉 분교에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고 두 달간 1학년을 가르쳤다. 그러다 옹진읍에 중학교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명색이 선생인데 중학교 졸업장은 받아야 할 것 같아 지원했다. 시험이 쉬워서 되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같이 본 애들 중 나만 불합격했다. 선생이란 사람이 중학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이 큰 죄를 진 것 같고, 누가 알까 창피했다. 괴로운 마음에 며칠 고민하다 교장 선생님께 중학교 가서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했다. 선생을 그만두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내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를 나와 혼자 책을 읽기도 하고 써보기도 하며 밤낮없이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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