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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만에 회식

by 자급자족

지난 1년간 거의 회식을 가지 못했다. 퇴근하고 몰입해서 도전하는 일도 있었고, 술을 한 모금도 못할 뿐 아니라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에너지가 소진된다. 매월 2만 원씩 회식비를 걷는데 1년 동안 남들 술값을 24만 원 찬조한셈이다.


2025년에는 매달 회식비로 3만 원을 인상하여 걷는단다. 남의 술값을 또 36만 원 찬조하게 생겼다. 2만 원에서 3만 원으로 회비를 올리니 훅 부담되는 느낌이다. 몇 달간 매진하던 보고서 초안도 끝나서 전송했겠다 올해 첫 회식에 참석했다. 이건 순전히 1만 원 더 올린 회비가 처음으로 아까워서다. 회식장소에 들어가자마자 "회식 회비 2만 원이면 안 오려했는데 3만 원으로 올리는 바람에 왔다. 오늘 4만 원어치 먹고 가면 되는 거야?"라고 소리쳤더니 다들 웃는다.


회식 메뉴는 목살, 삼겹살, 항정살 등이다. 동료들과 식당 전체를 빌렸고 우리 테이블에 세 번 고기를 리필했다. 다들 고기를 미친 듯 먹었다. 콜레스테롤 수치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치즈까지 구워 먹는다. 조금 더 먹으면 핏줄이 막히겠다.


올해 새 회장이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해 와서 참 즐거운 회식이었다. 맨날 입 꾹 다물고 퇴근 후 스터디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랜만에 시끄럽게 대화하는 무리에 끼어보니 역시 기 빨린다. 뽑기를 해서 나이키 가방과 로또 한 장을 받았다. 당첨되면 직장에 1억을 찬조하는 조건으로 로또를 나눠줬다. 다들 로또에 당첨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겠다고 찰나의 꿈이라도 꾸며 즐거워한다. "거.. 로또 돼 봐야 집 한 채도 못 사는 금액이잖아. 난 남편 모르게 당첨금 받아두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조용히 직장 다닐래."라고 했더니 또 껄껄댄다.


술에 취한 남자 상사가 옆자리에 앉는다. 눈이 반쯤 풀려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부탁을 하신다. 내년에 업무 관련 대회에 나가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냐고 하신다. 취중에 진담인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감사한 일도 있고 해서 도전할 마음이 있다면 도와드릴 생각이다. 단, 내가 스트레스받지 않는 선에서.


내가 생각해도 그 상사의 업무 아이디어가 아까울 때가 있다. 승진과 관계없이 한 번만 전국 상위권 수상을 해보고 싶고 직장생활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단다. 실은 전국에 흩어져 사는 분들의 이메일을 받고 한글 메모기능으로 봉사 컨설팅을 해드렸다. 그중 여러 명이 생애 첫 좋은 성과를 얻으셔서 펑펑 우신 분도 계셨다. 지금은 경기와 인천에서 거주하는 두 분께 봉사로 e-mail 컨설팅해드리고 있기에 같은 공간에 근무하는 상사를 안 도와드릴 이유는 없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술집으로 2차를 갔고, 나는 기가 빨려서 8시 30분에 귀가했다. 다들 체력도 좋다. 그러고 보니 대학 때 친구들 따라 노래방 갔다가 애들은 음주가무를 하고, 나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음에도 에너지가 빨려 잠들었던 적이 있다. 극내향인에게 음주가무는 권투보다 힘든 스포츠다. 다들 술과 고기를 그렇게 많이 먹고 2차 술집에서도 먹을 배가 남아있다니....단한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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